사우디·이집트 등 아랍국도 반대
뉴욕타임스 “중동자치 무시” 비판
“사실상 지정학적 판도라의 상자”

[천지일보=김빛이나 기자]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전쟁으로 초토화된 가자지구의 220만 팔레스타인 주민을 주변 아랍국으로 영구 이주시킨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구상이 국제사회에서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4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을 요르단과 이집트 등 제3국에 재정착시키는 방안에 대해 참모들과 논의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람들을 행복할 수 있고 총에 맞지 않는 좋은 집에 영구적으로 재정착할 수 있도록 하는 합의가 나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달 25일 이후 여러 차례 가자 주민의 제3국 이주 가능성을 언급한 트럼프 대통령이 처음으로 ‘영구적 재정착’을 공식화한 것이다.
로이터통신과 AFP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팔레스타인 주민이 떠난 가자지구의 소유권을 미국이 넘겨받아 개발하길 원하며 “이 땅을 다시 같은 사람들이 점유하거나 재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타냐후 총리와의 비공개 회담 후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미국이 가자지구를 관리하고 관련 사안을 주도할 것이며, 위험한 불발탄과 무기 제거 책임도 질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하마스 제거와 평화 회복 방안에 대해 네타냐후 총리와 심도 있게 논의했으며, 미국은 가자지구의 폐허를 치우고 경제 재건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팔레스타인 주민의 제3국 재정착 방안에 대한 구체적 절차나, 미국이 가자지구를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한 세부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트럼프 발언에 ‘인종청소’ 비판도
국제사회에서는 이러한 계획이 특정 민족을 조직적으로 몰아내는 ‘인종청소’로 간주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는 과거 나치 독일이 유대인에게 자행한 만행과 비교되며, 인류 최악의 범죄인 ‘제노사이드(genocide)’로 규정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만약 이러한 이주가 강제적으로 이루어지고, 미국이 가자지구에 군사력을 주둔시켜 이권을 확보한다면 국제법상 ‘인도에 반한 죄’로 간주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미 가자지구에서의 전쟁 범죄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체포 영장이 발부된 상태다. 이로 인해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번 조치는 중동 내 반미 정서 확산을 촉발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공존을 지지해온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들조차 강력한 반발을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조치가 과거 서방 열강이 중동 지역의 자치권을 무시한 채 국경선을 다시 그었던 시대를 연상시킨다면서 “사실상 지정학적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고 평가했다. 워싱턴포스트(WP) 역시 팔레스타인 주민과 아랍 국가들의 격렬한 반발을 유발하고, 미국이 중동 분쟁에 더 깊이 개입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분석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외교부 성명을 통해 “가자지구 주민의 강제 이주를 반대한다”고 밝히며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동안 사우디는 팔레스타인 독립국 수립이 전제되지 않는 어떤 중동 정책도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가자 주민의 이주 대상국으로 거론된 요르단과 이집트 역시 강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요르단은 과거 중동전쟁 이후 대규모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으로 내전을 겪은 바 있으며, 이집트는 심각한 경제 불안정으로 난민 수용 여력이 부족하다. 특히 하마스와 뿌리를 공유하는 무슬림 형제단이 난민 사이에 섞여 들어오는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이집트, 요르단, 아랍에미리트(UAE),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주변 아랍 5개국은 이달 1일 외교장관 공동성명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구상에 반대 입장을 공식화했다.
가장 큰 변수는 정작 당사자인 팔레스타인 주민들이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제1차 중동전쟁 당시 약 75만명의 팔레스타인인이 고향을 잃고 난민으로 전락한 아픈 기억을 가진 이들은 또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하마스 역시 이러한 이주 계획을 강력히 저지할 것으로 보인다. 통제하에 있던 주민들이 중동 각지로 흩어지면 조직 기반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