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새벽을 여는 사람들로 대한민국의 아침이 밝았다 ①

아무리 밤이 어지럽고 캄캄해도 아침은 온다. 세상의 낮은 곳에서 묵묵히 새벽을 밝히는 사람들로 인해서다. 한겨울 새벽 수산시장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춥지만 삶의 열기로 뜨겁다. 밤새 증기와 기름 냄새로 뒤범벅된 채 일하는 이들의 손에서 먹음직한 떡이 만들어진다. 강남 빌딩의 청소노동자들은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 일을 하러 새벽 첫차에 몸을 싣는다. 본지는 새해를 앞두고 자정을 넘긴 시간 일터를 지키는 사람들을 만나봤다. 그들에게 새해 소망도 물었다. 돌아오는 답변은 한결같았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서울 동작구 노량진수산시장 경매장에서 새벽 경배가 진행되고 있다. ⓒ천지일보 2025.01.01.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서울 동작구 노량진수산시장 경매장에서 새벽 경배가 진행되고 있다. ⓒ천지일보 2025.01.01.

[천지일보=김민희‧홍보영 기자] 지난달 23일 밤 12시 50분. 노량진수산시장 경매장은 이른 아침처럼 분주했다. 중도매인들은 꼬막, 홍합 등을 무더기로 옮겨 나르고 있었다. 노량진에서는 선어, 활어, 조개류, 갑각류 등 수산물 경매가 시간대별로 진행된다. 수산시장에 도착했을 때 한쪽에서는 조개류 경매가, 다른 한쪽에서는 제주산 은갈치 경매가 한창이었다. “7만 8000원, 7만 7000원…” 경매사가 속사포처럼 내뱉는 추임새가 귓전을 때렸다. 중도매인들은 수첩에 경매 낙찰가를 꼼꼼히 적어넣었다.

노량진 경매장의 시간은 바깥세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중도매인들은 자정께 시작되는 경매를 준비하러 밤 10시부터 시장에 나온다. 경매장 곳곳에서 돌림노래를 하듯 경매가 계속되다가 새벽 4시쯤 절정을 이룬다. 경매가 모두 끝나고 난 뒤 오전 10시쯤 경매장의 하루는 마무리된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서울 동작구 노량진수산시장 경매장에서 해산물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물을 공급하고 있는 모습. ⓒ천지일보 2025.01.01.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서울 동작구 노량진수산시장 경매장에서 해산물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물을 공급하고 있는 모습. ⓒ천지일보 2025.01.01.

낙지, 주꾸미, 꼬막 등을 납품하는 가게 직원인 박진수(가명, 남)씨는 30년간 노량진에서 낮과 밤이 바뀐 삶을 살았다. 박씨는 추위로 벌겋게 부은 얼굴로 “제일 못 자고 제일 빨리 일을 시작하는 곳이 수산시장”이라며 “대한민국의 기적은 노량진에서 이뤄진다”고 말했다.

그는 트럭에 주꾸미를 실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세상을 거꾸로 살아. 새끼들 얼굴 보기도 힘들어. 그래도 재미있어. 돈에 대한 어려움을 알지.” 박씨의 미소에서 삶의 희로애락이 스쳐 가는 듯했다. 산낙지부터 담아달라는 채근에 그는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노량진수산시장 중도매가게에서 일하는 박진수(가명)씨가 트럭에 수산물을 싣고 있다. ⓒ천지일보 2025.01.01.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노량진수산시장 중도매가게에서 일하는 박진수(가명)씨가 트럭에 수산물을 싣고 있다. ⓒ천지일보 2025.01.01.

노량진 중도매인들에게는 저마다 번호가 있다. 전국수산 ‘19번 중매인’으로 사는 허정희(80, 여)씨는 “여기 밥을 45년 먹고 살았다”고 말했다. 구건물에 있을 때부터 크게 장사를 해왔다는 그는 “옛날에는 고등어가 차에 3대, 4대씩 왔는데 지금은 많이 줄었다”며 아쉬워했다.

허씨가 경기 광명 집에서 나오는 시각은 밤 9시 반. 시장에서 이튿날 오전 10시까지 밤새 피곤한 줄을 모르고 일한다. 집에 들어가서 밥 한술 뜨고 나면 그제야 졸음이 몰려온다.

“한번은 진짜로 피곤했든 가봐. 남들은 밤 12시에 자도 여섯 시간 잠을 자는데 우리는 세 시간 내지 네 시간만 자며 일하니까. 내가 세상을 미련스럽게 살지 않는가. 이런 마음이 들어갈 때가 있어. 아무래도 내 몸이 좀 피곤할 때 그런 잡생각이 드는 것 같아.”

피곤하다는 생각을 뿌리치고 살아온 세월이 큰아들은 목사로, 큰딸과 둘째 아들은 사업가로 키워냈다. 막내딸은 허씨와 같은 중매인이 돼 곁에서 일을 돕고 있다.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노량진수산시장 19번 중매인 허정희(80, 여)씨가 제주산 은갈치를 진열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5.01.01.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노량진수산시장 19번 중매인 허정희(80, 여)씨가 제주산 은갈치를 진열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5.01.01.

이젠 일을 놓아도 될 법하지만 허씨는 그러질 못한다. “지금은 손 딱 떼고 남들같이 놀이도 다니고 구경도 다녀야 하는데. 자식들 안 굶기고 남한테 가서 빌려 먹지 않게 하려고 그 생각만 하고 평생 살아오다 보니. 멍청한 짓이야.” 허씨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듯 “멍청한 짓이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도 시장 일을 놓지 않은 덕에 그의 머릿속은 늘 깨어있다. “여기를 나오면 신경이 많이 쓰여. 내가 오늘 사입한 물건을 어떻게 해야 빚을 안 지고 팔까. 어떻게 이 많은 물건을 소비시킬까. 그것을 염두에 둬야 하거든.” 허씨는 “아직 귀도 엄청나게 밝고 눈도 밝아서 저쪽에 있는 글씨까지 다 보인다”고도 말했다.

요새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하지만 허씨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야물어서” 괜찮아질 거라고 믿는다. “(지금 위기를) 순조롭게 잘 넘어가고 서로가 잘해 나가면 좋겠어. 국회의원들은 국민들이 걱정하지 않게 싸움 좀 안 했으면 하고. 큰소리 안 내고 조용조용하게. 그래도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야물어. 잘될 거야.”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서울 동작구 노량진수산시장 경매장에서 새벽 경배가 진행되고 있다. ⓒ천지일보 2025.01.01.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서울 동작구 노량진수산시장 경매장에서 새벽 경배가 진행되고 있다. ⓒ천지일보 202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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