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을 수행법으로 활용한 이는 중국 당나라 때 선종(禪宗)의 명승 덕산(德山)이 유명하며 ‘할’은 역시 당나라 때 덕산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스님 임제(臨濟)가 유명하다. 그들은 각각의 효시자로 돼 있다. 이래서 ‘덕산의 방’ ‘임제의 할’이란 말이 회자된다. 기록에 전하기를 “덕산이 사정없이 내려치는 ‘방’은 소나기 소리 같고 임제의 ‘할’은 천둥 벼락 같았다”고 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 되면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 화엄경에 나오는 말이다. 깨우침, 돈오(頓悟)의 ‘궁극’은 생과 사의 경계를 무너뜨려 죽음의 공포와 세속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스러워지는 해탈(解脫)의 경지다. 바로 ‘일체무애’의 경지다. 처자 권속과 세속의 명리(名利)에 목을 매는 범인에게는 다가가기 어려운 상상의 경지에 그치고 말 것 같다. 수행자라 하더라도 정신 바짝 들게 하는 ‘방’과 ‘할’의 타율적 채찍이 필요한 것을 보면 깨우침의 열락(悅樂)에 이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을 웅변한다. 길이 없으면 혼자서라도 길을 내며 가는 수밖에 없지만 ‘선각(先覺)’이 낸 길이 있으면 아무래도 편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은 혼자 갈 수밖에 없을지라도 선각을 이룬 스승과 그 스승의 가르침, 채찍이 필요하다.
세상이 선방과 같을 수는 없지만 선방의 ‘방’과 할’을 빌려서라도 내려치고 대갈일성으로 깨우쳐주고 혼내줘야 할 일들이 많아졌다. 영토주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독도에 입도(入島)지원센터를 짓기로 했던 계획이 취소됐다. 우리의 전체 예산규모에 비한다면 그것에 소요되는 돈은 정말 모기 눈물 만큼에 불과하다. 정부 설명으로는 안전관리와 환경, 문화재 경관 등과 관련해 검토할 것이 더 있어 그랬다는 것이지만 석연치가 않다. 일본과의 외교마찰이 우려돼서라는 의심을 국민들은 버리지 못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국민은 정부를 ‘방’으로 내리쳐 혼내주고 천둥 벼락 같은 ‘할’로 꾸짖어 깨우침을 주어야 한다. 독도의 주인은 우리인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독도를 강탈해가려는 일본의 눈치를 봐야 하느냐는 말이다. 정말 화나고 속 터진다. 그렇게 물러 터져서야 어떻게 내 나라 땅을 지켜내겠는가.
그 뿐이 아니다. 권력 패권에만 관심을 쏟는 골칫거리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다음 대통령 후보 물색에 정신이 없다. 국제기구 요직에 있으면서 국제적 명사가 된 인물을 이 당 저 당에서 서로 자신들의 대통령 후보로 모셔오겠다고 난리들이다. 현직 대통령이 임기를 많이 남겨 놓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그 요직에 있는 인물의 자리도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경제 안보 등 정치인들이 풀어야 할 절박한 숙제들이 첩첩히 쌓여 있는데도 그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국민들이 뒤숭숭해졌다. 정말 극히 아픈 ‘방’, 특별히 무서운 ‘할’이 필요할 것 같다. 사실 고질병을 스스로 못 고치는 우리 정치권은 ‘방’과 ‘할’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곳이었다.
또 있다. 퇴직 공무원에 지급하는 연금 적자가 누적돼 나라 살림이 거덜이 나게 생겼는데도 공복(公僕)들의 집단 항거로 그 개혁 작업이 난항을 겪는 중이다. 국민의 누가 그 당사자라도 즐거워할 수 없는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섬기고 봉사하는 국민과 나라를 위해 유연해져야 한다. 이 나라가 각종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정말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하는 어려운 사람들은 집단으로 길을 막는 시위에 나서지 못한다. 시위에 쓸 시간이 없어서다. 상대적으로 보통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고소득 계층과 직종, 소득자들이 시위에 열성인 것을 국민들은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것을 그들은 모르는가.
한편 일소되지 않는 공직자들의 비리와 부패는 특단의 ‘방’과 ‘할’이 있어야 한다. 비리와 부패로 이 나라 공직 사회에 썩은 냄새 안 나는 곳이 없는 지경이다. 뒤늦게 발각돼 연속으로 터지는 방산비리는 빙산의 일각이다. 어느 한 자리를 차지하면 으레 국민과 국가를 위한 본분은 잊고 그 자리가 제공하는 권력을 사유화해 한 몫 챙기는 것이 습성화됐다. 그 같은 의식이 고쳐지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영원히 맑아지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고치지 못한다면 국민 모두가 비리 부패에 대한 철저한 감시자, 경계자가 돼야 하며 그러려면 국민 스스로 비리 부패에 연루되거나 빠지지 않아야 하고 그런 유혹의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국민의 ‘방’과 ‘할’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일일부작 일일불식).’ 선종의 계율이다. 이 계율이 가르치는 것처럼 사람은 생명이 온 곳을 모르고 차후에 갈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일하고 먹어야 한다. 좀 더 옳은 순서로 말한다면 먹기 위해 일해야 한다. ‘일체무애’에서 그것만은 예외이며 아무도 그 ‘걸림’에서만은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게 보면 속세와 종교의 바탕은 같다. 적어도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한다는 그 예외적인 ‘걸림’이 절대적인 공통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 위에서 세속인의 명리추구도 이루어지며 종교의 구원과 복음 전파, 수행을 위한 정진도 이루어진다.
이전투구는 추하지만 세속인의 명리추구에도 사명이 있다. 종교와 세속을 꼭 ‘신성’과 ‘비신성’으로 구분 짓는 것은 교만이다. 그렇더라도 종교의 길은 세속의 명리추구와는 본질에서 다르다. 종교는 세속의 미몽을 깨우는 등불 내지는 사표가 되어야 하며 썩은 냄새가 나는 곳에는 비리 부패의 곰팡이를 죽이는 햇볕과 소금이 돼야 한다. 도리어 종교가 세속적인 물욕과 탐욕에 오염돼 거대 건물을 올리거나 재산을 늘리려 힘쓰는 대신 봉사와 자선에 더 열심히 나서야 한다. 안 그러면 자칫 국민이 드는 ‘방’과 내지르는 ‘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