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북송 희령(熙寧) 9년인 AD 1076년, 밀주(密州) 태수였던 소동파는 노산의 도교사원을 둘러보았다. 태청궁을 찾았을 때 ‘네모난 호리병처럼 아름다운 풍경(方壺勝景)’이라는 궁제(宮題)를 짓자, 도사 왕념지(王念之)가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아쉽게도 비석은 명말에 노산에서 일어난 불교와 도교의 싸움으로 훼손됐다. 소동파가 방문했을 당시 태청궁은 ‘태평흥국원(太平興國院)’이라 불렀다. 도사 교서연(喬緖然)과 오부흥(吳復興)이 소동파와 함께 장자암을 찾았다. 밤이 늦도록 암자에 머물던 그들은 자시 무렵에 암자 앞의 소성촌(蘇姓村) 백성들이 일찍부터 땔나무를 하러 가는 소리를 들었다. 먼저 일어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깨워서 함께 가는 것을 본 소동파는 산골사람들이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며 질박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그 감동을 전하기 위해 마을을 ‘인의지리(仁義之里)’라 불렀다. 인의를 아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마을 사람들도 소동파가 자기 마을을 찾아 온 것을 기념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이것이 하나의 풍습으로 대대로 이어졌다.
원풍(元豊) 8년인 AD 1085년, 황주(黃州)에서 은거생활을 끝내고 등주(登州)로 부임하던 소동파는 배를 타고 지나가던 길에 앙구만(仰口灣) 기슭에 올라 태평흥국원의 도사 교서연을 만났다. 그는 아름다운 도교의 노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듣고, 소성촌 사람들의 초대에 응하기도 했다. 그 후에도 영주(穎州), 양주(楊州), 정주(定州)에 있을 때 마을로 사람을 보내 각별한 정을 표시했다. 도사 교서연이 이러한 소동파의 정을 기리어 ‘동파인리’라는 비석을 세우려고 하자, 노산 기슭에 살던 산골 사람들이 모두 적극적으로 나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 ‘소성촌’은 소동파를 기리기 위함이다. 마을 사람들도 소동파의 간곡한 마음을 인의(仁義)로 받아들였음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옛 고을에도 여기저기에 전직 지방관들의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져있다. 천편일률적으로 어떤 지방관이 선정을 베풀어서 영원히 잊지 못하겠다는 내용도 식상하지만, 비석을 세우는 일을 과연 고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궁금하다. 그 중에 과연 얼마나 진심이 깃들었을까? 비문의 내용과 함께 다른 여러 가지 사항에 관한 연구가 더 진행이 되면 거기에 얽힌 갖가지 역사적 사연들이 밝혀질 것이고, 그것을 통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