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논설위원, 시인)

지난 어버이날에는 둘째형님 내외를 모시고 우리 가족들이 함께 외식하고 영화구경을 갔다. 가족들이 모이면 영화 한 프로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어서 그때마다 극장을 자주 찾는데, 이번에는 며칠 전에 개봉한 사극 영화 <역린>을 관람했다. 역린(逆鱗)은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을 말함인 바, 즉 군주가 노여워하는 군주만의 약점 또는 노여움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화는 조선조 비운의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인 정조(1752∼1800)가 즉위한 1년에 왕의 암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숨 막히는 24시간을 그린 내용이다. 실제로 1777년 7월 28일 발생했던 ‘정유역변(丁酉逆變)’ 실화를 모티브로 한 스토리로서 소재가 소재인지라 전체적으로 무겁게 흘렀다. 하지만 정조가 신하에게 강조하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대사한 말이 자꾸 뇌리에 떠올려진다. 그 말은 2014년 5월의 현 시대상의 변화에 당위성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진다.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감동시키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중용 제23장, 영화 <역린> 중 정조의 대사)’
그 말을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동서고금을 통해 완벽하게 맞는 말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누구든 지극정성을 다하게 되면 자신과 세상을 변하게는 할 수 있겠지만 오늘날의 사회현상이 호락호락하지가 않는 상황에서는 어려울 수 있다. 영화에서 정조가 한 말의 유래는 중국 전국시대의 법가사상가인 한비자가 쓴 <한비자> 중에 역린과 관련된 글이 있는데, 글의 소제목은 ‘세난(說難)’이다. ‘유세의 어려움’이란 뜻으로, 신하된 자로서 임금에 대한 처신이니 지금 입장으로 따지자면 대통령 또는 권력자에 대해 민심을 바르게 전달하는 문제다.
가뜩이나 우리 사회에서 국가지도자나 정치인에 대한 불신, 공공 부작용에 따른 불만이 크게 팽배해있는데, 이번 세월호 참사의 결과에서 입증되는 바와 같이 국정이나 공공부문, 사회 전반에서 시스템과 운영상에서도 허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더 이상 지금의 상태로서는 ‘대한민국’호가 전반이 부실했던 세월호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을 터이니 무엇보다 국가사회의 틀을 제대로 짜는 혁신이 시급히 요구되는 시기다.
역대정부가 국민을 위한답시고 온갖 정책을 내놓았지만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단편적인 계획들은 현상을 해결하는 임기응변적으로 움직이는 데 그치고 말았다. 민생의 마당에서 어지러운 현재의 난문제를 덮고서 국가기관이나 정치인들이 자기 몸집을 불리고, 부처이기주의에 충실하다보니 국민이익보다는 정권 또는 당리당략적 이익에 집착하는 데 급급해왔다.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국민을 편안케 하는 민생위주는 한낱 구호에 빛나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 국가가 개조되고 사회가 변혁돼서 국민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고, 주인이 되는 참된 나라의 기틀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성세대의 생각이 바뀌어야 하고, 학교교육의 개혁을 통한 미래세대의 영양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무엇보다 핵심은 공적(公的) 부문으로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들이 각성해 일대변혁을 가져와야 한다.
영화 <역린>에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처절한 주검으로 내몬 내력을 잘 알고 있는 그 고통 속에서도 국사에 정성을 다함으로써 세상이 달라지는 미래를 꿈꾼 인물이다. 하지만 자신이 절제하고 고통을 감내하면서 ‘정성을 다하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강력한 모토로 실천해서 다른 세상을 만들려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로부터 230여 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은 세월호 참사라는 아픔 속에서 공공(公共)에 대한 국민 불안은 크며, 성난 민심은 들끓고 있다. 그런 마당에 국민의 봉사자인 대통령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공직자들은 대오각성해야 한다. 특히 대통령과 정치권은 다시는 이런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무한책임을 갖고 국가를 개조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지극정성을 보여야 한다. 하여 먼 훗날에 세월호 참사가 ‘달라진 세상을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게 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