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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죽었나?”
평생 죄책감에 시달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도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 A(40대 후반, 여)씨는 분홍색만 보면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멈칫한다. 그는 분홍색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30여 년 전 중학교 2학년인 A씨는 평소와 같이 방과 후 집으로 향했지만 그곳엔 따뜻한 품으로 자신을 반겨주던 엄마가 아닌 차갑게 식어버린 주검이 A씨를 맞았다. 엄마가 장롱에 분홍색 빨랫줄을 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이 모습을 목격한 A씨는 경찰서에 신고하는 등 시체를 수습했다. 정신없이 그 시기를 보내고 다 잊은 듯했으나 아직도 무의식중에 분홍색만 보면 그 모습이 떠올라 자살 충동을 느낀다. “나 때문에 엄마가 죽은 게 아닐까?” “내가 공부를 못해서 그렇게 가신 걸까?” “보고 싶다. 엄마를 따라가고 싶다” 등 엄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는 괜찮지만 어려움이 닥치면 자신도 모르게 엄마와 같은 방법으로 자살을 생각한다.

가족이나 지인 등을 자살로 보낸 유가족들이 평생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최근 ‘단역배우 우봉식 자살’ ‘세 모녀 동반 자살’ ‘SBS 프로그램 짝 출연자 자살’ 등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같은 사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된 이후 온라인상에 ‘자살’이라는 키워드 검색량이 2배 이상 증가했다.

또 보도된 후 그 방법을 따라 하는 자살 건수도 늘었다. 한국의 자살률은 10년 새 2배 가까이 증가했다. 2012년 통계청이 발표한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2012년 자살에 의한 사망자 수는 1만 4160명으로 2002년 8612명에서 10년 새 40% 정도 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012년 기준) 중에서 한국의 자살률은 29.1명으로 1위를 차지했다. OECD 평균(12.5명)의 2.3배에 달하는 수치다. 무엇보다도 자살로 부모나 자식, 지인을 잃은 유족은 그렇지 않은 가족에 비해 자살의 위험에 쉽게 노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보건기구(WHO) 자살예방지침서 등에 따르면 한 사람이 자살하면 평균 6명의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2년에만 1만 4160명의 자살자로 8만 4960명의 자살 유가족이 생긴것이다. 자살고위험군으로 분류된 이들은 ‘자살 생존자’ ‘자살 유가족’ 등으로 불린다.

최미정 서울시자살예방센터 네트워크및유족지원팀원은 “자살로 가족이나 지인을 잃을 경우 일반적인 교통사고, 암 등에 의한 유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 고통스러운 애도 과정을 겪는다”며 “고인을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상실감이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집에서 시도한 경우 해당 유가족은 당시 장면이 자꾸 떠올라서 불면증과 자살 충동 등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걸린다”라며 “이들은 가족구성원 중 한 사람이 자살시도를 하면 자신도 그 방법으로 자살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외국에서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처럼 고통이 크다고 해서 이들을 ‘자살 생존자(Suicide Survivor)’라고 부른다. 이처럼 유가족들은 평생 상처를 안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자살 위기자뿐만 아니라 자살 생존자에 대한 적절한 예방 및 상담 조치를 병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택수 한국자살예방센터장은 “한국 문화 특성상 자살 유가족에 대한 돌봄이 미약하다”며 “자살 유가족은 죄책감과 자존감 저하 등으로 우울증에 걸려 자살 충동을 느끼기 쉬운데 주위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게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정 센터장은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상한 시선으로 보거나 죄인취급해선 안된다”며 “주위에 있는 자살 유가족을 ‘우리들의 이웃이다’고 생각하며 보듬어주고 용기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살 유가족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선 유가족 지원 자조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다. 서울시자살예방센터는 2007년부터 한 달에 한 번 ‘자작나무(자살유족의 작은 희망 나눔으로 무르익다)’라는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자살 유가족은 같은 입장에서 어려움이나 괴로운 경험을 터놓고 얘기하고 물품을 정리하는 법과 주변에 알리는 것 등 허심탄회하게 나눈다. 또 개별 상담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생명의 전화 등에서 자조모임이 진행되고 있으나 많은 유가족을 감당하기엔 적고, 참여도도 저조하다. 정 센터장은 “자살 유가족들이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슬픔을 나누는 자살 유가족 모임 활성화 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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