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청송 주왕산 용연폭포 ⓒ천지일보(뉴스천지)

이번 여행의 주제는 시인 조지훈(1920∼1968)과 주왕산이다. ‘둘의 공통점은무엇일까’하고 한참을 고민했더랬다. 겨우 떠오른 것은 ‘청(靑)’이었다.

여정은 여느 때보다 간단했다. 청송군 주왕산과 영양군 주실마을, 이 두 곳에 발 도장을 찍으면 됐다. 시인 조지훈(1920∼1968)을 조금 더 생각하게 됐다. 자연스레 ‘시인도 주왕산에서 시감(詩感)을 얻었겠지’란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한 것 같이 주왕산과 시인 조지훈을 공통으로 말할 수 있는 단어는 청(靑)이다. 그렇다면 ‘청(靑)’이란 무엇인가. 푸른색과 더불어 젊음, 봄, 동쪽을 상징하고 있지 않은가. 시인에게 ‘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다. 일제강점기에 등단한 조지훈은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靑鹿派)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고 무엇보다 ‘지조론’을 통해 절개와 지조를 논했다. 그야말로 푸른 소나무 같은 삶을 살아간 이가 조지훈이다.

주왕산은 청송군에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청송군의 뜻도 ‘푸른 소나무(靑松)’다. 소나무가 많아 청송인가 했더니 역시나 주왕산에서 눈을 두는 곳마다 소나무가 있었다. 우리나라가 소나무 천국이긴 하지만 최근 잘 보지 못한 점을 생각했을 때 겨울 주왕산에서 만난 소나무들이 정겹고 반갑다. 만물이 쉬는 겨울에도 소나무의 푸른 기운이 산 전체를 덮는다.

경상북도 BYC(봉화, 영양, 청송)로 유명한 청송과 영양은 경상북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로 알려졌다. 그만큼 사람의 손때가 타질 않아 청정고장으로 유명하다. 경북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두 고장 모두 산이 많다. 영양의 북쪽에는 일월산(1218m)이 솟아올라 그 아래로 봉우리들을 만들고 있다. 청송 역시 주왕산을 둘러싼 900m 내외의 산들이 있다.

◆주왕을 기억하는 산

먼저 청송군 부동면에 위치한 주왕산이다. 산은 해발 721m이며 설악산, 월출산과 더불어 3대 돌산(바위산)으로 유명하다. 태백산맥 남쪽에 위치하며 600m가 넘는 봉 12개가 주왕산과 어울린다. 1976년 국립공원, 2003년 명승 제11호로 지정됐다. 산은 화산폭발로 만들어졌다. 폭발 당시 생긴 돌 부스러기들이 쌓여 굳은 응회암 지대가 비바람을 맞고 견디며 만들어진 자연의 작품이다. 바위로 둘러싸인 산들이 병풍과 같다고 해 ‘석병산(石屛山)’이라고도 한다. 계곡 일원에는 연꽃 모양의 연화봉, 떡을 찌는 시루 모양의 시루봉 등이 눈에 띈다.

지난달 20일, 눈(雪)이 쌓인 터라 정상은 눈(目)에 담고 폭포 주변을 거닐었다. 우뚝 솟은 암벽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모습을 아래에서 위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지만 수만 년 또는 수천 년간 비바람을 맞이한 바위들이 부드러우면서도 장중하다는 게 느껴진다. 평소엔 암벽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지만, 겨울인 탓에 밑으로 내리다 꽁꽁 언, 그래서 공중부양한 얼음을 볼 수 있다. 따뜻한 봄기운이 느껴질 때까지는 물이 아닌 얼음이다.

왜 주왕산인가. 중국 당나라 때의 일이다. 주도(周鍍)가 ‘주(周)나라를 다시 일으켜 왕이 되겠다(後周天王)’고 하여 당나라의 도읍지 장안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패배한 주도는 신라에까지 들어오게 됐다. 주왕(周王)이 되어 보겠다고 한 그는 신라 땅을 밟고 이름 모를 산에서 기거하다가 당의 요청으로 정벌에 나선 신라 마 장군의 화살에 쓰러졌다. 주왕(편의상 주왕이라고 하겠다)이 깃발을 꽂았다는 기암(期巖), 그가 군사를 숨겨뒀다는 무장굴, 그가 최후를 맞은 주왕굴 등이 주왕을 기억하고 있다.

▲ 주왕굴 ⓒ천지일보(뉴스천지)

주왕의 최후는 ‘덧없는 인생’을 그대로 보여준다. 주왕은 굴(주왕굴)에 숨어 살면서 위에서 떨어지는 물로 세수하다가 마 장군이 쏜 화살과 철퇴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주왕의 후주천왕(後周天王)은 한낱 꿈으로 날아갔지만 주나라 초기의 옛 명성을 다시 돌리고 싶은 염원은 이국의 산에 고스란히 남았다.

주왕산 곳곳에서 소나무를 소개하는 안내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니 그보다 소나무의 푸름이 겨울 주왕산에서 단연 돋보인다. 특히 한국인은 소나무와 일생을 함께한다는 문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출생을 알리는 것이 금줄이며, 금줄에 거는 것이 소나무 가지다. 금줄의 금(禁)이 ‘금하다’라는 뜻을 가졌듯 잡스럽고 삿된 기운을 막는 힘이 소나무에 있다고 믿어왔다.

그리고 소나무의 푸른빛은 생명의 상징이니 갓 태어난 생명에게 소나무는 의미가 매우 크다. 딸이면 오동나무를, 아들이면 소나무를 심는데 딸이 시집갈 때 장롱을 해보내고, 아들이 장가들 때 관을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 묻힌 묘 주변에는 소나무들을 둘러 심었다. 집 또한 소나무로 지었다고 한다.

또한 “소나무 근처에서 퇴비를 만들지 않는다”라는 말이있다. 소나무엔 항균작용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송편을 만들 때 시루 밑바닥에 솔잎을 깔아 놓는데 송편은 솔향을 머금기도 하지만 항균 처리된 먹을거리가 된다.

우리는 예부터 소나무에 인격과 신성을 부여했다. 민간과 도교에선 소나무는 영원불멸을 상징하고, 장엄하고 장대한 노송은 하늘의 신이 땅에 내려올 때 이용하는, 하늘과 땅을 서로 이어주는 영물로 여겼다. 그리고 매섭게 추운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아 기개 있는 군자와 선비의 덕을 나타냈다. 그래서 소나무와 관련된 시조와 시가 많다.

생각이 바르면 말이 바르다.
말이 바르면 행동이 바르다.
매운바람 찬 눈에도 거침이 없다.
늙어 한갓 장작이 될 때까지
잃지 않는 푸르름.
영혼이 젊기에 그는 늘 청춘이다.
오늘도 가슴 설레며
산등성에 그는 있다.
- 유자효 ‘소나무’ 전문 -

주왕산의 자랑거리엔 기암(奇巖), 소나무와 더불어 깊은 계곡이 있다. 암봉들을 한 차례 구경하고 나면 그 끝나는 곳에 제1폭포를 시작으로 제2폭포와 제3폭포가 등산객을 맞이한다. 겨울이라 공중부양을 한 얼음이 반겨주었지만 그래도 좋다.

전국에서도 오지라고 알려진 청송. 그래서 다행이다. 찾는 이가 드물어 제 색을 간직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연의 푸른빛을 마음에 담고 푸른빛을 띠는 한 시인을 만나러 영양으로 발길을 돌렸다. 영양 주실 마을이다.

2편에 이어집니다

김지윤 기자 jade@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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