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치자 대한독립 만세

三月이 가까이 오면 우선 아우내 장터에서 최초로 독립만세를 외치던 유관순 열사의 모습과 음성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때의 그 사건이 하나의 흘러간 역사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 독립만세를 시발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의식을 고취 시킬 수 있었던 것은 누구나 아는 바다. 그러나 三月 一日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만천하에 선포한 33인의 주도 세력이 바로 그리스도인들 이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즉 3.1운동의 정신은 바로 기독정신에서 기인되었다.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 하에 백성들이 희망을 잃어 갈 때 각 단체에서 개별적으로 민족독립운동을 전개 하였다.

그러나 한계(限界)를 느끼자 연합전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최남선등 천도교(天道敎)인 15명, 길선주등 그리스도인 16명, 한용운등 불교인 2명의 민족 지도자들이 대연합전선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리스도교는 정신적 또는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자주정신(自主精神)을 서서히 회복 하면서 급기야는 광복(光復)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겉으로 나라는 해방(解放)이 되고 광복(光復)이 되었지만 다른 부분(속)까지 해방이 되었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때다.

해방과 함께 겪어야 했던 동족상잔(同族相殘)의 후유증은 또 다른 외래의 문화와 정신의 속박(束縛)을 가져왔다. 우리는 그동안의 습관으로 그것이 구속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어찌 그뿐인가? 정신적 자유함의 결여는 ‘나’외 ‘너’는 인정 할 수 없고 ‘이편’이 ‘저편’을 낳고 세대간에는 생각이 다르고 지역간에는 골이 깊어지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는 원수가 되고 제도는 또 다른 제도를 낳고 도시와 농촌 간에는 반목과 질시로 하나가 되기 어려운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무엇보다 우리는 남과 북의 국토(國土) 통일(統一)을 실현해야 하는 필수 과제를 갖고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가 하나가 되지 못한 채 갈라지고 갈라져 있는 이 상황 속에서 무엇을 기대 할 수 있겠는가? 종교세계는 어떠한가?

특히 기독교 세계는 그 숭고한 사상을 망각하고 각기 제 갈 길로 산산조각이 나 있으니 1919년 잃었던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고 타 종파까지 아우러 민족독립의 기치를 들어 만방에 알렸던 그 때는 과연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하는가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아우내’ 즉, 내(川)가 합쳐져(아우러져) 하나로 된다는‘병천(竝川)’ 다시 말해 각기 다른 것을 하나로 묶는다는 의미의 유관순 열사의 만세터 ‘아우내 장터’가 진정 다시 도래(到來) 할 수는 없을까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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