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으론 백범 존경한다 말하나 현실은 겉과 속 다른 티나
복원해도 삼성병원에 갇혀 병원 이전만이 유일한 대책
복원, 단순한 건물 복원 아냐 굴절된 韓 현대사 복원하는 것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포르말린 냄새를 풍기는 병원 안. 환자와 보호자로 정신없는 틈 속에 이리저리 둘러보니 우측 한편에 비상통로로 보이는 곳이 있다. 문에는 ‘경교장 복원 공사 현장’이라고 쓰여 있었으며 출입이 통제됐다.
경교장은 정치인뿐만 아니라 각계각층 유명 인사들의 입에서 존경 인물로 꼽히는 백범 김구 선생이 임종을 맞은 곳이다. 때는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은 주한 미군 방첩대(CIC) 요원이었던 안두희의 저격으로 경교장 2층 집무실에서 암살됐다.
따뜻한 햇볕이 서서히 내리쬐던 지난달 말, 김인수 (사)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겸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 대표를 만났다. 김 대표 덕분에 출입통제 중이던 문을 쉽게 통과해 비참해진 역사의 현장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경교장은 본격적인 복원 공사에 앞서 이달 중순, 내부 시설 철거가 이뤄질 계획이다. 복원이 진행되기까지 역사의 현장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여 온 김 대표에게서 15년 동안의 심경을 들었다.
◆비참한 경교장 현실을 목격하다
“처음 김구 선생의 집무실을 본 순간은 잊을 수 없어요. 피 묻은 환자복이 쌓여져 있고, 집무실이었던 곳은 의사 휴게실로 쓰이고 있었어요”
그는 2층 우측 벽 쪽이 집무실이었는지 알아보려고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확인해본 결과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고 전했다.
경교장의 비참한 현실을 본 그는 “역사적 존경 인물로 꼽히는 김구 선생의 집무실이자 암살됐던 곳을 어떻게 그리 이용할 수 있는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경교장은 1945년 12월 3일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 등 임시정부 국무위원 15명이 청사로 사용하면서 첫 국무회의를 연 뒤 마지막 청사로 사용한 장소라 의미가 깊다. 또한 백범 선생이 민족 분단을 막기 위해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남북 협상을 준비했던 산실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중에는 미군 의무부대의 주둔지였고, 1956년부터 베트남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1968년 삼성이 인수한 뒤 강북삼성병원 부지로 편입돼 병원 시설로 쓰였다. 경교장 내 임시정부 국무회의장이었던 곳은 약품 창고와 병원 원무과로, 김구 선생 집무실은 의료진 휴게실로, 이시영 선생 집무실은 화장실로 각각 변형됐다.
2004년도에는 사단법인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과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주최로 제1회 ‘임정 대장정 순례단’이 발족됐으며, 상하이 임정청사 앞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순례단은 임정 요인들이 일제의 추격을 피해 상하이에서 항저우를 거쳐 자싱~하이옌~쩐장~한커우~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까지 이동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1만 3000리 길을 순례했다.
김 대표는 “나중에 알고 보니 중국 정부의 경로가 임정 요인들이 지나온 길과 같았다”며 “중국 정부보다 앞서갔던 임정요인들이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대장정 해단식을 갖기 위해 백범 집무실을 찾은 순례단은 삼성병원 측의 거부로 집무실로 들어가지 못했다. 병원 측에서 순례단이 들어가려고 하는 곳이 의사들의 휴게실이라며 막아선 것. 상하이를 둘러보고 마지막 김구 선생이 눈을 감았던 역사적 현장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에 김 대표는 울분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한다.
이윽고 1시간가량 농성한 끝에 문이 열렸지만, 내부 상황을 목격한 순례단은 또 다시 침울할 수밖에 없었다. 김구 선생이 저격을 당해 쓰러진 자리에는 의사들을 위한 휴대 침대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바둑판이며, 도시락 까먹은 흔적 등 비참한 상황이 펼쳐졌다.
김 대표는 “민족의 스승인 김구 선생이 흉탄에 쓰러진 역사의 현장에서 침대를 놓고 잠을 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며 통분했다.
◆역사의 현장 지키기 위해 혈혈단신 운동 벌여
김 대표가 경교장 복원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백범의 암살범인 안두희에게 진상규명을 받아내기 위한 운동을 벌이다가 암살 장소가 궁금해져 경교장을 찾았기 때문이다.
“암살범 안두희를 쫓아다니면서 진상규명을 요청하고, 결국 92년도 5월 23일에 그를 포대자루에 납치를 했지요. 진상규명 활동을 하다 보니 암살의 현장도 중요하다 여겼고, 창고나 다름없게 쓰이던 경교장 모습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죠.”
비참해진 역사의 현장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그는 경교장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던 찰나 96년 삼성에서 경교장을 헐고 17층짜리 신축 건물을 짓는다고 발표했고, 김 대표는 철거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문화재 지정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조순시장과 김영삼 대통령에게 문화재 지정 청원서를 내고, 당시 서울시 문화재위원(지금 문화재청)에도 지정 요구를 했다.
김 대표는 삼성 이건희 회장에게 “경교장을 국가에 헌납하고 국민 품으로 돌려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길거리로 나서 경교장을 알렸으나 여관으로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반응을 본 김 대표는 문화재 지정이 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96년도에 철거 위기 유보 상태를 해놨더니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경교장을 용산 백범 선생 묘소가 있는 곳으로 뜯어 가려는 것. 김 대표는 국회의원 62명의 서명을 받아 가까스로 경교장 자리를 지켰다.
그 결과 경교장은 2001년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등록되고, 2005년에는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465호로 지정됐다.
또한 김 대표는 이어 “처음에 경교장을 누가 살렸는지 아냐. ‘물 좋아하면 물에 빠져 죽는다’는 옛말이 있듯이 故 이병철 회장이 재벌이지만 골동품을 수집하기로 유명했다”며 “그런 이 회장이 경교장은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가 활동했던 곳으로 알고 철거하지 말고 뚫어 병원을 연결해 쓰자고 제안해 경교장이 살아남은 것”이라고 말했다.
◆올바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 정립
4월 13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다. 하지만 김인수 대표는 “엄밀히 따져보면 수립일이 13일이 아니라 11일이 맞다”고 주장했다.
“당시 상하이 시내에 외교 사절이 많이 있었어요. 13일은 임시정부 수립을 알리는 공문을 뿌려 알린 날입니다. 그러니 수립하고 기념행사를 거행한 11일이 더 정확합니다.”
김 대표의 말은 공포 전에 이미 수립됐으니 11일이 맞고, 공포는 수립 이후 이뤄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해방 이후 13일로 공식화되고 굳어져 바꾸기 힘들어졌기 때문에 그날을 지키고 있는 것. 그는 이어 “광복회에서는 임정 수립일을 4월 11일로 바로 잡기 위해 운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외롭고 힘들었던 15년, 이제부터 또 시작
사실 김 대표는 백범 김구 선생의 직계 후손이 아니고, 따지고 보면 전혀 연관성이 없다. 그런데 15년을 오로지 경교장 하나 위해 쓴 소리를 들어가며 지금 이 순간까지 버텨왔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다.
“경교장 복원은 단순히 건물만 복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굴절된 한국 현대사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김 대표는 경교장을 지켜야만 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일축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이 말은 김 대표가 고증을 통해 처음 만들어 불리게 된 것이라고 함)이며 남북협상의 산실, 백범 선생이 암살된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할 일은 강북삼성병원을 이전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병원 측은 경교장 때문에 노이로제 걸린다는 표현을 관계자에게 듣곤 한다”며 “삼성이 처음부터 경교장을 국가 유산으로 내놓고, 병원은 더 넓고 좋은 곳으로 이전했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