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고려, 기름·꿀 넣은 ‘유밀과’ 인기
모양 화려해 국가행사 때 사용

차 문화 발달로 대중에 널리 퍼져
‘품귀현상’으로 재료 가격 치솟자
조정서 유밀과 금지령 내리기도

조선, 강정 등 과자 민가에 유행
설·혼례·회갑 때 반드시 올려
영조 “비용 비싸… 모두 없애라”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2017년 설 명절이 다가왔다. 설 명절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음식 중 하나가 바로 ‘한과’다. 일상에서 흔히 알려진 건 유과·약과·강정·다식 등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문헌에 따르면, 한과 종류만 무려 200여개나 된다고 한다. 오고가는 이들과 함께 먹는 한과는 언제부터 우리나라 전통 설 명절 음식이 됐을까.

◆삼국유사에 기록된 과일모양 과자

한과에 대한 가장 빠른 기록은 ‘삼국유사’에 있다. 기록에 따르면, 금관가야를 세운 김수로 왕 시절에, 추운 겨울 상차림을 할 과일이 없어 고민하다 곡식 가루로 과일 모양을 빚은 후 과일에 나뭇가지를 꽂아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신라 김유신 장군과 관련된 내용도 있다. 613년 김유신 장군이 고구려 첩자 백석에게 납치당할 뻔 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신라를 지키는 신들인 ‘호국신’이 김유신 장군 앞에 나타나 한과를 전해 주면서 백석이 고구려 첩자라는 사실을 알려줬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또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왕비가 이바지 음식의 하나로 과자를 만드는 재료를 가져왔다는 기록과 수로왕조에 ‘과(果)’가제수로 처음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과’는 곡식을 가루 내어 과일 형태로 만든 과를 사용한 것으로 예상된다.

◆고려시대 화려한 모양 ‘유밀과’ 인기

고려 시대에는 찹쌀가루로 만든 유밀과가 인기였다. 유밀과는 기름과 꿀을 넣어 반죽한 과자로, 약과나 다식 등을 말한다. 화려한 모양새를 뽐내다보니, 고려시대에는 연등회, 팔관회 등 국가적 행사에 유밀과를 올렸다. 임금 탄생일 등 연회에도 사용됐다.

1157년 의종 임금은 사찰에서 유밀과를 구했다. 차 문화를 적극 발전시킨 사찰에서 차와 함께 먹는 과자를 직접 만들었기 때문. 이때 차 문화가 대중에게 널리 퍼지면서 유밀과의 인기가 커졌다.

그런데 한번 맛본 유밀과의 맛에 너도나도 빠지다 보니, 그만 문제가 생겼다. 공급에 비해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 이때 유밀과의 재료인 기름·꿀·밀가루 등의 품귀현상으로 가격이 치솟게 됐다. 고심 끝에 조정에서는 유밀과 금지령을 내렸다.

‘고려사’에 따르면, 명종 22년(1192년)에는 유밀과의 사용을 금지하고 나무열매를 쓰라고 했고, 공민왕 2년(1353년)에도 유밀과 사용을 금지했다. 당시 유밀과가 얼마나 성행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시대, 민가에 널리 퍼진 한과

조선시대에는 유밀과나 강정 같은 과자가 민가에까지도 널리 유행했다. 이 당시 설날음식이나 혼례·회갑 음식으로 과자를 반드시 만들어야 했다. 이처럼 과정류(한국 전통과자, 외래과자와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가 성행하자 조선시대에도 금지령이 내려졌다.

조선왕조 종합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따르면 “헌수(獻壽: 환갑잔치 따위에서 주인공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술잔을 올리는 것), 혼인, 제향(祭享) 이외에 조과(造菓: 유밀과나 과자 따위)를 쓰는 사람은 곤장을 맞도록 규정한다”고 기록돼 있다.

또 영조실록(1751년)에도 한과 금지령이 기록돼 있다.

“한과가 쓸데없는 비용으로 많이 드는데 몹시 정(精)하지 못하다. (생략) 이 뒤에는 모든 제사에 있어서 한과라고 이름한 것은 한결같이 모조리 없애 인삼정과(人蔘正果)와 같은 등속들도 또한 감제(減除)해 이를 영원히 정식(定式: 일정한 방식)으로 삼도록 하라.”

이처럼 우리 전통 과자인 한과는 고려·조선시대에 그 맛이 좋아 금지령이 내려질 만큼 귀한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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