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우 부산환경교육센터 이사

남명 조식선생께서 말년에 은거했던 지리산 자락 덕산마을 산천재의 처마에는 ‘소부와 허유’의 고사를 표현한 소박한 벽화가 한 점 그려져 있다.

소부와 허유는 둘 다 은자(隱者), 즉 세속 권력과 명예를 거부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 사람으로 전해진다. 소부는 나무 위에 까치집을 짓고 살기 때문에 소부라 불렀다. 허유는 자연에 맡기고 꾸밈이 없는 자였다. 이 두 사람은 당대에 어질고 고결하기로 이름이 높은 사람이었다.

요임금은 자신의 덕이 허유만 못하다 하여 허유에게 자기 대신 천자가 되어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허유는 이를 거절하고 돌아가 소부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소부는 허유를 꾸짖어 “자네가 가만히 숨어 있으면 그런 더러운 소리가 왜 자네 귀에 들어 오겠는가? 쓸데없이 돌아 다니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들었지. 다시는 나를 찾지 말게.”라며 허유의 등을 쳐서 내쫓아 버렸다.

쫓겨 나온 허유는 몹시 슬펐다. 허유는 맑은 물가에 와서 귀와 눈을 씻었다. ‘공연한 말을 듣고 좋은 친구와 의를 끊었다’ 하고 허유는 기산 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이 때 변중부라는 사람이 소를 몰고 나와 물가에서 소에게 물을 먹이다가 허유가 그 물에 귀를 씻었단 말을 듣고 ‘이 더러운 물을 나의 소에게 먹이다니’ 하면서 물을 먹이지 않고 소를 끌고 돌아 갔다.

소부와 허유는 노장사상, 즉 도가의 핵심 원리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상징하는 인물이다. 권력과 명예 따위의 인위적인 가치는 도(道)와 자연의 흐름을 해칠 뿐이라는 노장사상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무위자연’은 ‘인위적 개입을 최소화해 자연이 스스로의 질서로 돌아가게 둔다.’라는 의미다. 즉 억지로 통제하거나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고, 사물의 고유한 흐름을 존중하는 태도를 말한다.

요임금의 제위 선양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최고의 영광이겠지만 허유는 그것을 인위(人爲)의 극치, 마음을 흐리는 ‘세속적 소음’으로 보았다.

이렇듯 허유와 소부의 삶은 자연과 더불어, 억지로 무엇이 되려 하지 않는 존재 방식을 보여준다. 바로 ‘억지로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이루는 상태(무위이무불위, 無爲而無不爲)’다.

이들에게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인 권력과 명예 따위는 모두 자연을 흐리는 인위적 집착이요, 자연의 리듬에 따라 살며 마음을 비우며 자연과 조화로움을 이루는 것. 스스로 무엇이 되려 하지 않고, 흐름을 따르며 세속의 ‘오염’을 멀리해 도(道)와 가까운 삶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가치였다.

이러한 소부와 허유의 삶은 생태문명전환이 요구되는 현대사회의 생태적 지향과도 완벽히 일치한다. 인간을 자연과 분리된 지배자가 아니라 자연 속의 존재로 재위치시키는 모델이다.

우선 이들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자연중심주의적 사고를 보여준다. 권력이나 사회적 제도, 정치적 욕망같은 ‘인위(人爲)’를 멀리하는 태도는 생태계의 자율성(self-regulation)을 인정하는 태도와 닿아 있다. 즉 이들은 자연을 인간이 ‘관리’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스스로 흐르고 스스로 회복하는 생태계의 고유한 힘으로 본다.

또한 이들은 생태적 절제(eco-minimalism)를 구현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들의 생활은 단순하다. 과도한 소비도, 과도한 조작도 없다. 자연에서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남기고, 흐름을 따를 뿐이다. 저소비·저에너지의 생태적 미덕이다. 생태발자국을 최소화한 삶이다. 생태계에 부담을 주지 않는 지속 가능한 존재 방식이다. 이들은 자연을 이용하는 인간이 아닌 자연과 함께 사는 인간의 모델이다.

소부와 허유는 생태 파괴의 근본 원인이 인간의 욕망임을 지적한 선구적 인물이기도 하다. 이들은 ‘권력·지배·명예’가 자연 질서를 해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았다. 이는 생태 위기의 원인을 인간의 욕망·과잉 개입·지배 욕구에서 찾는 관점이다. ‘문명의 과도한 확장이 자연파괴를 낳는다’는 가장 초기에 등장한 철학적 비판이다.

또한 이들은 자연 속에서의 ‘비지배적’ 관계 형성을 추구한다. 은자들은 자연을 ‘정복’하거나 ‘관리’하지 않는다. 그저 몸을 맡기고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는 생태학의 핵심 가치인 비지배적 관계, 상호 의존성, 생태적 조화라는 가치와도 완전히 일치한다. 인간이 ‘주인’이 아니라 ‘공동 거주자임’을 보여주는 태도다.

한마디로 이들은 인간을 자연과 동등한 존재로 재위치시키고, 생태계의 스스로 회복 능력을 신뢰하고 자연의 자율성을 존중하며, 절제와 단순성을 통해 생태발자국을 최소화한 삶을 추구하며, 문명과 욕망을 생태파괴의 원인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을 통제 대상이 아니라 공존 대상으로 보며, 인간의 욕망·지배·과잉 개입을 거부해 생태계의 자율성과 조화를 실천한 가장 오래된 ‘생태적 인간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삶이 부러운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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