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트럼프에 ‘핵잠 연료’ 요청
트럼프, 승인 ‘美서 건조’ 조건 걸어
美 조선소, 조선기반의 물리적 한계
핵잠 건조 추진 시 최소 수년 걸려

한국 해군 잠수함 장영실함. (출처: 연합뉴스)
한국 해군 잠수함 장영실함. (출처: 연합뉴스)

[천지일보=김빛이나 기자] 경주 APEC 기간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핵추진 잠수함(SSN) 사업의 ‘출발점’을 미국으로 옮기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구상이 공개되자, 한국 내 조선·방산 업계와 전문가 그룹에서 즉각적인 우려가 쏟아졌다.

핵심 논점은 두 가지다. 첫째, 그동안 국내에서 축적해 온 설계·통합·시험 생태계를 제쳐두고 첫 건조지를 미국으로 옮기는 데 따른 손실과 그에 대한 파장이다. 둘째, 트럼프 대통령이 지목한 필라델피아 ‘한화 필리십야드(Hanwha Philly Shipyard)’가 현재로선 핵잠 건조에 필수적인 방사선 차폐·원자로 통합·초정밀 용접·보안(QA)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산업적 현실이다. 이 두 문제가 겹치면, ‘정치적 승인’에도 불구하고 실제 전력화 일정이 장기 표류할 수 있다는 비관론이 힘을 얻는다.

◆첫 단추부터 ‘미국 건조?’… “국내 주도권 약화”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이후 자신의 SNS에 글을 올리며 “한국에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승인했다”고 밝혔고, 첫 건조지를 ‘필라델피아 조선소’로 특정했다. 한국 정부가 그간 추진해 온 핵잠 보유 구상에 ‘정치적 사인’이 떨어진 셈이지만, 건조지의 지정 방식과 위치는 국내 산업계에 적잖은 충격이었다.

업계는 “첫 함을 해외에서 시작하면, 2·3번 함의 국내 이전과 핵심 기술 내재화 속도가 느려지고 비용·통제권의 균형도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로이터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 취지를 전하며, 한국 산업부 측이 “필라델피아 건조와 관련한 세부 논의에 관여한 바 없다”고 선을 그은 점도 소개했다. 이는 ‘누가, 무엇을, 어디서’ 만들지에 대한 정책·산업 거버넌스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방증으로 읽힌다.

정상회담 당시 이재명 대통령은 연료(핵잠 추진용 우라늄)와 연료주기(재처리·농축) 문제의 실질 진전을 공개 요청했다. 비확산 민감성을 지닌 사안이기에, 설령 정치적 원칙 합의가 이뤄졌더라도 기술·감독·규제의 ‘제도 설계’ 없이 선체 건조만 외부에서 먼저 진행되는 구조는 국내 주도권을 약화시킬 소지가 크다. 특히 어느 연료 체계(HEU/LEU)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후속 운용·정비·감독의 난이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필리십야드, 핵잠 설비 전무”

국제·방산 전문매체들은 한목소리로 “필라델피아 조선소는 상선 중심의 상업적 야드이며, 핵잠 건조에 필요한 방사선·원자로 통합 설비와 품질보증 체계가 현재는 없다”고 짚었다.

브레이킹디펜스는 ‘한국 핵잠의 첫 건조를 미국에서’라는 정치적 선택이 미국 해군 조선 기반에도 수많은 물음표를 던진다고 평가했다. 설비 전환과 인력 양성, 엄격한 보안·QA 체계 구축이 선결이며, 이는 ‘수년 단위’ 투자와 허가를 요구한다는 분석이다.

조선업계 현황을 전한 조선비즈 영문판 또한 “필리십야드는 잠수함 관련 건조 설비가 없으며, 이를 갖추기까지 최소 수 년이 필요하다”고 직설적으로 지적했다.

더구나 미국에서 원자로(핵) 추진 함정을 실제로 ‘지어 본’ 민간 조선소는 단 두 곳뿐이다. 미 의회조사국(CRS)과 회계감사원(GAO), 미 해군 연구기관 자료에 따르면, 제너럴다이내믹스 일렉트릭보트(GD/EB·코네티컷)와 헌팅턴잉걸스 뉴포트뉴스(HII/NNS·버지니아)가 미국 내 유일한 핵추진 함정 건조 능력을 보유한다.

이들 두 야드는 버지니아급·컬럼비아급 등 미 해군 핵잠 프로그램으로 이미 포화 상태에 가깝다. 여기에 AUKUS(미·영·호)의 호주 핵잠 패키지까지 얹히면서 미국의 핵잠 산업기반은 ‘캐파·인력·서플라이체인’ 삼박자 압박을 지속적으로 받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핵잠 야드인 필리십야드가 단기간에 ‘세 번째 핵잠 조선소’로 변신하긴 구조적으로 벅차다는 평가가 합리적이다.

◆“투자하면 되지 않나” 반문에도 한계점 분명

정치권 일각에선 “현대화 투자로 필라델피아를 신속히 업그레이드하면 된다”는 낙관론도 제기한다. 실제로 미국 내에서는 ‘한국 조선 3사와의 협력을 통한 미 조선산업 부흥’ 구상을 소개하며, 필라델피아에 수십억 달러 대규모 투자가 논의되는 것으로 보도됐다.

하지만 돈만 투입한다고 핵잠 야드가 되는 건 아니다. 방사선 관리 구역 설계, 원자로 격실·차폐·냉각 계통 통합, 해체·정비에 이르는 생애주기 보안·품질 체계는 일거에 생기지 않는다. 숙련 용접·배관·비파괴검사 인력의 장기 양성, 고신뢰 소재·부품 공급망 인증, 군사보안과 IAEA·국내 규제기관의 다층 승인까지 모든 고리가 맞물려야 한다.

브레이킹디펜스와 폴리티코는 “필리십야드는 ‘군함’이 아닌 ‘상선’ 중심 야드이며, 군사용 핵추진 플랫폼으로의 전환은 비용·일정·규제 리스크가 중첩된다”고 분명히 못 박았다.

◆일정·비용의 이중 리스크… “첫 전력화 시점 더 멀어질 수도”

국내에서 오랜 기간 준비해 온 시나리오는 대개 ‘국내 건조 라인 + 한국형 원자로 통합’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첫 함을 미국에서 시작할 경우, 설비 전환과 인력 육성, 규제·감독 체계 정비가 병렬로 진행돼야 한다. 이 과정이 어긋나면 전력화 일정은 길어지고, 사업비는 가파르게 상승한다.

미 해군 조선 기반의 구조적 제약을 분석한 GAO 보고서와 CRS 자료에 따르면 ‘핵잠 건조가 가능한 야드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산업적 현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 결국 ‘정치적 승인’이 ‘실전 배치’로 이어지는 고리는 생각보다 훨씬 길고 험난한 상황이다.

국내 조선·방산 생태계의 관점에서 첫 함 해외 건조는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미국 내 조선 인프라 현대화에 한국 기술·장비·인력이 투입되면서 동맹 기술동조화·공급망 공동화를 선도할 기회가 생긴다. 다른 한편으로는 핵심 노하우의 ‘현장 학습(learning by doing)’이 국내에서 일어나지 못해 내재화 속도가 떨어질 수 있다. 특히 원자로-선체 인터페이스, 복합 차폐·소음저감, 방사선 안전·정비 생태계 같은 ‘핵잠의 핵심’은 책상 설계로 배우기 어렵다.

1번 함의 품질·공정 데이터, 고장·결함 통계, 공정개선 사이클이 국내 현장에서 누적돼야 2·3번 함에서의 국산화·표준화가 속도를 낸다. 이 루프를 초기부터 해외에서 돌리면, 국내 조선소의 기술체화가 늦어질 공산이 크다. 산업계가 우려하는 ‘주도권 역외 이전’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결과적으로 정치적 계산이 오히려 국가 안보에 저해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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