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공백기 청화자기 인물형 ‘죽림칠현도’… 연구과제

43㎝ 크기 정교한 화풍 운문․기석․초문으로 꽉 채워

조선 전기 문화재급 ‘청화백자 세한삼우도 유개 큰 항아리(歲寒三友圖 有蓋 大壺)’가 찾아졌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5.08.25.
조선 전기 문화재급 ‘청화백자 세한삼우도 유개 큰 항아리(歲寒三友圖 有蓋 大壺)’가 찾아졌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5.08.25.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지금까지 전례가 없는 조선 전기 문화재급 ‘청화백자 세한삼우도 유개 큰 항아리(歲寒三友圖 有蓋 大壺)’가 찾아졌다.

이 청화백자는 일본 왕실가에서 소장한 유물이었으나 사업상 유대가 깊었던 한국인 수장자에게 기증하면서 한국에 돌아온 것이다. 이 자기는 회회청(回回靑)을 사용해 소나무, 매화, 대나무를 그리고 중앙에 죽림칠현 풍속화를 그렸다.

이 자기의 고증은 전 충북도문화재위원이자 한국역사유적연구원 이재준 고문이 지난해 여름 학회연구논문을 통해 발표했으며 8월 중순 한․일 도자 관계자 토론회에서 공개됐다.

세한삼우도 큰 항아리는 전고 43㎝, 구경 16.5㎝, 저경 19.2㎝의 크기이며 청화로 그린 화풍도 품격이 높다. 이 자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명대 초 경덕진 관요 도요지가 수난을 당한 공백기(空白期)자기의 화풍을 보인다는 점이다.

공백기란 정통(正統, 1436~1449), 경태(景泰, 1450~1457), 천순(天順, 1457~1465)시대를 지칭하며 약 30년간 경덕진 관요 어기창이 수난을 받은 때를 말한다. 이 시기는 정치적 상황이 격동했고, 경덕진 관요는 오랫동안 불을 줄이거나 불을 끄는 암흑 상태에 놓이게 됐다.

이 고문은 논문에서 “명대 초 공백기 자기의 특징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전면에 시문된 ‘운기문(雲氣紋)’이며, 이 문양은 원대 청화백자부터 등장하는데 조선 15세기 중반 명나라 청화백자의 도입시기와 맞물려 일시나마 광주 가마에서 같은 모양의 자기가 번조됐다는 것을 알려 준다고 설명했다.

송죽매를 그린 뚜껑 상면과 연봉(왼쪽)과 모래가 많이 붙은 굽의 점사현상(우). 구연부가 좁고 뚜껑도 작으며 연봉이 장식된 단아한 형으로 청화로 아름답게 세한삼우를 시문했다. 이재준 고문은 논문을 통해 “자기의 굽 저면에 보이는 모래받침 점사(粘砂) 현상과 유약을 바르지 않은 부분의 화석홍(火石紅)은 진품임을 반영하는 동시에 조선 전기 번조 유물임을 입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5.08.25.
송죽매를 그린 뚜껑 상면과 연봉(왼쪽)과 모래가 많이 붙은 굽의 점사현상(우). 구연부가 좁고 뚜껑도 작으며 연봉이 장식된 단아한 형으로 청화로 아름답게 세한삼우를 시문했다. 이재준 고문은 논문을 통해 “자기의 굽 저면에 보이는 모래받침 점사(粘砂) 현상과 유약을 바르지 않은 부분의 화석홍(火石紅)은 진품임을 반영하는 동시에 조선 전기 번조 유물임을 입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5.08.25.
죽림칠현 부분도. 이 고문은 “이 도자기에 그려진 인물도는 죽림칠현도(竹林七賢圖)로 보이며 등장인원은 9명이나 죽화(竹畵)를 완상하고 있는 선비는 7명으로 이들과 동떨어진 한 사람은 시자(侍者)를 거느리고 만발한 매화를 완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5.08.25.
죽림칠현 부분도. 이 고문은 “이 도자기에 그려진 인물도는 죽림칠현도(竹林七賢圖)로 보이며 등장인원은 9명이나 죽화(竹畵)를 완상하고 있는 선비는 7명으로 이들과 동떨어진 한 사람은 시자(侍者)를 거느리고 만발한 매화를 완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5.08.25.

세한삼우도 큰 항아리의 특징은 명대 대관(大罐) 등 큰 기물과는 형태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이 고문은 “명나라 대관이나 장군관(將軍罐)의 뚜껑은 삿갓형 투구 형태인데 반해 조선시대는 구연부가 좁고 뚜껑도 작으며 연봉이 장식된 단아한 형으로 청화로 아름답게 세한삼우를 시문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뚜껑의 세한삼우도는 명나라 최고의 청화작품으로 평가되는 선덕(宣德, 1426~1435) 시기의 품격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고문은 “이 도자기에 그려진 인물도는 죽림칠현도(竹林七賢圖)로 보이며 등장인원은 9명이나 죽화(竹畵)를 완상하고 있는 선비는 7명으로 이들과 동떨어진 한 사람은 시자(侍者)를 거느리고 만발한 매화를 완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선비들은 유자(儒者)의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머리에는 유건((儒巾)을 썼는데 이는 명나라와 조선시대 선비들의 평상복”이라고 설명했다.

명대 공백기 청화자기 인물도.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5.08.25.
명대 공백기 청화자기 인물도.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5.08.25.

이 그림들은 중국에 남아있는 공백기 자기 인물들과 풍모가 비슷하다고 이 고문은 밝히고 있다. 그는 이 청화백자의 번조시기가 공백기 후기인 세조의 왕위찬탈 시기로서 당시 사육신의 처형과 생육신의 자연 은둔 등 죽림칠현 정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지 연구해볼 과제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 고문은 도자기에 그려진 기석(奇石)은 송․원대의 기풍이 보이며 난초문(蘭草紋)들은 꽉 차게 그린 원대자기의 화풍을 계승하고 있어 조선 전기 청화자기 도입시기의 유행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고문은 이런 도자기가 태어난 배경을 조심스럽게 추정하고 있다. 명나라 공백기시 경덕진 도공들은 황명에 의해 거의 경덕진을 떠났으며 일부는 민간요에 흡수되고 일부는 유랑하는 처지가 됐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 시기 일부 도공들이 바다를 건너 경기도로 들어와 조선 초기 청화백자 번조에 영향을 준 것 아닌지 연구할 과제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여러 유적이나 절터 혹은 서울 청진동 지역에서 공백기 시기 청화파편이 많이 발견 된 사례가 있다. 당시 중국은 엄격하게 청화자기나 회청의 반출을 강력 규제했기 때문에 도공들이 작은 기물은 소지해 들여왔거나 상륙해 광주 도요에 간여하지 않았으면 이 같은 많은 출토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고문은 또 논문에서 “경기도 회암사지나 서울 혹은 청주에서 출토된 청화자기들은 공백기 대접이나 청화반 등 작은 기물임을 들어 이 자기들은 유구국(流球國, 오끼나와)을 통한 진공품으로 혹은 중국 도공들에 의해 지참, 전달됐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번에 조사한 대호는 광주 관요가마에서 번조하지 않으면 중국에서 운반하기 어려운 큰 자기”라고 부연했다.

한편 이 고문은 이 자기에 나타나는 기포(氣泡)에 대해 언급했으며 광주일대 관요가마터에서 수습되는 초기 회청으로 시문한 청화백자 파편의 기포와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의 굽 저면에 보이는 모래받침 점사(粘砂) 현상과 유약을 바르지 않은 부분의 화석홍(火石紅)은 진품임을 반영하는 동시에 조선 전기 번조 유물임을 입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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