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거나 하늘이 잔뜩 흐리고 바람이 몹시도 부는 날이면 뜨끈뜨끈하게 잘 데워진 온돌 생각이 간절하다. 흔한 말로 뜨끈뜨끈한 아랫목에서 몸을 ‘지지고’ 싶어진다. 온돌문화는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지만, 아궁이에 불을 때 방안 온돌을 데우는 곳은 이제 그리 많지 않다. 상당 부분이 입식주거 형태로 바뀌긴 했어도 보일러로 방바닥을 후끈하게 데우는 문화는 여전하다. 소파에 앉기보다 소파를 등받이 삼아 바닥에 앉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지는 우리에게 온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문화임에는 틀림없다.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내게 있어 온돌이란 추운 겨울이면 따뜻한 아랫목을 손주들에게 내어주시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하나의 장치이기도 하다.
아궁이와 가까운 아랫목은 그 열기에 장판이 까맣게 타 들어갈 정도였다. 뜨끈하다 못해 데일 것처럼 뜨거운 방바닥 때문에 엉덩이를 얼마나 많이 들썩거렸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 시절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온돌에 대한 기억은 비슷한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 온돌의 탄생
온돌은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온 바닥 난방방식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닥 난방방식이다. 영국의 권위 있는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에도 ‘온돌(On-dol)’이 ‘한국의 바닥 난방장치’라고 표기됐을 만큼 우리의 우수한 난방문화다.
온돌을 사용한 흔적은 기원전 5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함경북도 회령시의 회령오동 유적과 함경북도 웅기군에서 발굴된 기원전 5000년경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움집)로 추정되는 서포항 굴포리 유적에서 온돌 사용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4세기경의 황해도 안악 3호분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온돌의 초기 형태로 보이는 아궁이와 연도가 묘사돼 있는 것으로 보아 온돌의 역사가 오래됐음을 알 수 있다.
온돌이 방으로 만들어진 통구들의 형태는 고려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아궁이와 가까운 아랫목을 상좌로 해 방안에서도 자리의 위계질서를 세웠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7(1417)년 5월 14일자에는 당시 설립한 지 얼마 안 된 성균관의 유생들 가운데 중병을 앓는 이들이 생기자 온돌방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세종 7(1425)년에는 성균관의 온돌을 5간으로 늘리도록 했으며 16세기가 돼서야 전부 온돌방이 됐다.
“정사를 보고, 윤대를 행하고,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성균관 학생들이 습질(濕疾)에 걸리는 일이 많다는 말을 듣고 좌부대언(左副代言) 김자(金赭)에게 가서 살펴보도록 명하고, 공조(工曹)로 하여금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수리하여 각각 5간(間)을 온돌(溫堗)로 만들어 주도록 하고, 또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목욕탕과 판등(板橙) 80을 만들어 주도록 하고 장흥고(長興庫)로 하여금 장관청(長官廳, 성균관 장의 방)에 포진(鋪陳)을 깔게 하고, 예조로 하여금 항상 의관(醫官)을 보내어 학생으로서 병나는 자가 있으면 곧 증세를 살펴 치료하도록 하였는데, 대개 17일 윤대를 행할 때에 대사성(大司成) 황현(黃鉉)의 계달(啓達)에 따른 것이었다(<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7월 19일).”
기후가 유난히 추워 ‘소빙하기’로도 불리던 16~17세기를 거치면서 온돌이 점차 보급되기 시작해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일반 백성의 초가집까지 온돌을 널리 사용하게 됐다.
현재는 온돌의 원리를 참고해 온수 보일러의 동관을 바닥에 매설하는 방식의 바닥 난방이 전통 온돌을 대체하며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 온돌, 주거문화의 정수를 담다
바닥을 따뜻하게 데우는 난방 방식인 온돌은 우리네 주거 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식 라디에이터와는 달리 공간 전체를 고르게 데우는 방식은 자연스럽게 바닥에 앉거나 눕는 생활양식으로 나타났다. 덩달아 방석이나 이불, 소반과 같이 생활용품이나 가구 또한 좌식 생활에 맞게 발전해갔다.
온돌 난방은 한옥 구조에도 영향을 줬다. 온기가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방의 배치와 구조가 설계됐고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의 위치도 효율적인 열 순환을 고려해 설치됐다.
추운 기후를 가진 북부 지방에서는 난방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온돌이 집 전체에 깔린 폐쇄적인 구조가 많았으며, 중부 지방에서는 온돌방과 마루가 균형을 이루는 구조가 발달해 사계절의 기후에 대응했다.
반면 남부 지방은 온돌보다는 대청마루와 같은 개방적인 구조가 더 많이 발전했는데, 이는 습하고 더운 남부 기후에 최적화된 형태였다.
온돌의 가장 큰 장점은 효율적인 난방이다. 아궁이에서 피운 불의 열기가 구들장을 통과하며 공간 전체를 따뜻하게 유지시켜주는 구조는 겨울철 극심한 추위를 견딜 수 있게 해줬다.
또한 온돌은 공기로 열을 전달하는 다른 방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도 변화가 적으며, 공기 순환이 잘 이루어져 쾌적한 실내 환경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장점에 속한다.
반면 구들과 방바닥이 갈라지거나 깨지면 연기가 올라와 일산화탄소 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 열이 전달되는 데 시간이 걸리며 구조상 아랫목과 윗목에 온도차가 발생하는 등의 단점이 있다.

◆ 온돌의 구조와 원리
온돌은 시대와 지방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방 밖에 있는 아궁이에서 불을 피우면 아궁이의 열기가 구들장 아래에 있는 고래를 타고 방바닥 전체를 데우면서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궁이-부넘기-구들 개자리-고래-고래 개자리-굴뚝’ 순으로 열기가 전달되면서 마지막에 굴뚝으로 연기가 빠져나가는 방식에는 열의 ‘전도’ ‘복사’ ‘대류’라는 과학적 원리가 담겨있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열이 방바닥에 깔린 돌까지 전달되는 것을 열의 ‘전도’현상이라 하며, 물질을 통하지 않고도 열이 전달되는 현상을 ‘복사’라고 한다. 뜨거운 여름철 아스팔트가 햇빛을 흡수했다가 방출하면서 바닥이 뜨거워지는 원리를 생각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따뜻해진 방바닥의 공기는 위로,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이동하면서 방 전체가 따뜻해지는 과정은 ‘대류’ 현상으로 설명된다.
온돌의 구조 중 ‘부넘기’는 불목, 불고개로도 불리는데 아궁이에서 발생한 열기가 구들(방의 바닥)로 들어가게 만드는 곳이다. 솥을 거는 부뚜막 벽면에서 시작해 구들장 밑의 고래로 연결되는 열기의 통로다.
‘고래’는 아궁이에서 땐 강한 불이 탈 때 생기는 열과 연기가 나가는 방 구들장 밑으로 나 있는 길이며, ‘구들 개자리’는 부넘기 너머에 파놓은 골로서 열이 고래 전체로 골고루 갈 수 있도록 한다.
‘고래 개자리’는 굴뚝과 구들 사이에 있는 벽 바로 안쪽에 깊게 파인 고랑으로 열과 연기가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도록 하며 재티 등을 걸러내는 기능을 한다.
온돌의 구조가 얼핏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과학의 원리가 담겨 있으며, 무엇보다 좌식문화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반도 지역의 온돌문화는 2018년 4월 39일 국가무형유산(국가무형문화재 제135호)으로 지정됐다.

“한국인의 방은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난방 방식이다. 이것은 태양열을 이용한 복사 난방보다도 훌륭하다. 발을 따스하게 해주는 방식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난방이다.”
근대 건축의 거장인 미국의 유명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는 한국의 전통 온돌에서 영감을 받아 미국에서 최초로 바닥 난방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바로 위스콘신주 메디슨에 지어진 ‘제이콥스 주택(jacobs house)’이다.
이외에도 미국의 과학자 퍼시벌 로웰(1855~1916)은 자신의 저서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1885)’에서 온돌문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기도 했다.
“온돌은 겨울철 방안을 따뜻하게 하는 일종의 화로 역할을 한다. 방 밖에 난로용 구멍이 있는데 이것을 ‘아궁이’라 부른다. 불을 때면 더운 연기가 벌집처럼 돼 있는 미로를 따라 방바닥에 넓게 퍼진다. 아이디어가 뛰어나다.”
민족이 수천 년 전부터 사용해온 온돌문화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닥 난방방식이자 생태환경을 고려한 바닥 난방의 근원이 ‘온돌’이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시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