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유산 깃든 ‘겸재정선길’
도심 속 정자·땅굴·미술관까지
실경산수 시선으로 길 재구성
역사·자연·예술 함께 걷는 시간
![[천지일보 서울=송연숙 기자] 소악루에서 바라본 한강. ⓒ천지일보 2025.05.11.](https://cdn.newscj.com/news/photo/202505/3268290_3332119_323.jpg)
[천지일보 서울=송연숙 기자] 봄기운이 만연했던 지난달 26일 토요일 오전 10시, 9호선 양천향교역 1번 출구 앞에 시민 10여명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서울시 문화프로그램 ‘한강역사탐방’의 일환으로 운영 중인 ‘겸재정선길’ 체험에 참여한 이들이다. 각자의 운동화를 고쳐 신고 서울시 인증 해설사의 안내를 따라 도보 탐방을 시작한 발걸음은 곧 조선 후기의 시공간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조선 후기 실경산수화의 대가로 그의 화폭에 수차례 담긴 서울 강서구 양천 일대의 풍경을 따라가는 ‘겸재정선길’은 약 2.5㎞ 거리다. 도시의 풍경을 감싸는 언덕길, 향교와 산성, 땅굴과 미술관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단순한 걷기 코스를 넘어 서울의 역사와 예술, 문화가 입체적으로 겹쳐진 시간의 통로였다.
◆향교에서 시작된 시간의 문턱
탐방의 출발지는 서울 유일의 향교인 양천향교. 조선 태종 12년(1411년)에 창건된 이 향교는 공자를 모신 대성전과 강학의 공간인 명륜당을 갖춘 서울시 지정 기념물이다. 향교 앞 석비 ‘하마비(下馬碑)’는 조선시대 관리들이 이곳에서 예를 갖췄음을 보여주는 유교 정신의 상징물로 이 일대가 조선 후기 교육과 예절의 중심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어지는 장소는 양천초등학교. 갑오개혁 이후 과거제도 폐지로 1900년대 초 세워진 이 학교는 구한말 교육 제도의 변화까지 포괄해 보여준다. 해설사는 “조선 후기 겸재 정선이 활동하던 이곳은 양천현이라 불렸으며 지금은 서울의 변두리처럼 여겨지지만 그 당시엔 도성 외곽의 자연과 맞닿은 공간이었다”고 설명했다.
![[천지일보 서울=송연숙 기자] 양천향교 입구. ⓒ천지일보 2025.05.11.](https://cdn.newscj.com/news/photo/202505/3268290_3332120_358.jpg)
◆겸재가 사랑한 언덕, 궁산과 소악루
향교를 지나 오르막길을 조금만 오르면 궁산에 닿는다. 해발 80m의 낮은 산이지만 정선이 사랑했던 조망처이자 ‘양천팔경’ 실경의 중심 무대다. 정상에 오르면 마곡지구와 한강, 상암동까지 탁 트인 전망이 펼쳐진다. 겸재는 이곳에서 자연의 표정을 반복해서 관찰하고 그림에 담았으며 그 시선이 머물렀던 자리엔 오늘날 시민들의 감탄이 겹쳐진다.
궁산에는 조선의 누정문화를 복원한 ‘소악루’ 정자가 있다. 바람이 머물고 풍경이 멈추는 이곳에서 참가자들은 한참을 머물렀다. 근처에는 통일신라 시기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궁산산성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이는 한강 하류를 지키던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궁산의 역사적 위상을 말해준다.
궁산 산자락을 따라 내려가면 예상치 못한 역사적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궁산땅굴’은 일제강점기 말 태평양전쟁 시기 무기와 탄약을 숨겨놓기 위해 굴착된 시설로 김포비행장을 감시하거나 공습 시 지휘본부로 활용하기 위한 용도였다고 전해진다. 좁고 긴 통로, 차가운 공기, 전시 안내판은 참가자들에게 일제강점기의 현실과 긴장감을 실감 나게 전달했다.
◆실경산수의 거장, 겸재 정선을 만나다
도보 코스의 종착점은 겸재정선미술관이다. 정선이 머물렀던 자리에 조성된 이 미술관은 그의 대표작 ‘경교명승첩’ ‘양천팔경’ 등을 전시하며 실경산수화의 세계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하는 공간이다. 한 참가자는 “화첩으로만 보던 그림의 실제 배경을 밟고 나서 전시를 보니 시대가 통째로 살아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참가자 김은숙(70대, 양천구 목동)씨는 “외국에선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면서 정작 서울 안의 이야기는 몰랐던 것 같다”며 “해설과 함께 걷는 이 프로그램이 교육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었다”고 밝혔다. 고영자(70대, 서초구 반포동)씨도 “서울에 수십 년 살았지만 오늘 들은 이야기는 대부분 처음 들었다”며 “서울을 새롭게 만난 느낌”이라 전했다.
서울시는 현재 ‘겸재정선길’을 포함한 총 16개 한강역사탐방 코스를 운영 중이다. 모든 탐방은 무료로 제공되며 사전 예약을 통해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 특히 올해는 각 코스에 스탬프 인증제를 도입해 시민 참여를 더욱 유도하고 있다.
![[천지일보 서울=송연숙 기자] 궁산에 있는 서울양천고성지. ⓒ천지일보 2025.05.11.](https://cdn.newscj.com/news/photo/202505/3268290_3332121_429.jpg)
‘겸재정선길’은 단순한 도보 프로그램을 넘어 서울의 역사, 예술, 자연을 동시에 경험하는 입체적인 시민 여가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고 있다. 겸재가 붓으로 기록한 풍경을 오늘의 시민들이 발걸음으로 되살리는 이 여정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겹겹의 기억과 시간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