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지금도 중국인에게 영웅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윤봉길(1908~1932) 의사의 상해의거(1932년 4월 29일) 거사 모습이 담긴 사진을 소개한다.
이는 고(故)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가 소장한 원본사진으로, 정 연구가는 자신의 사재를 모두 팔아 40여년간 전 세계를 돌며 외국인 선교사나 외국인이 찍은 약 7만장의 근현대사 기록사진을 모았다.
일제는 1932년 1월 28일 제1차 상해사변을 일으켜 상해(상하이)를 점령했고 4월 29일 일왕 생일에 맞춰 점령 전승축하행사를 홍구공원(홍커우공원, 현재는 루쉰공원)에서 가졌다. 상해전쟁을 주도한 일제 군 수뇌부들과 고위 관리들이 참석한 가운데 윤봉길 의사는 축하행사를 하는 단상에 폭탄을 던졌다. 이로 인해 시라카와 요시노리 욱군 대장, 가와바타 데이지 상해거류민 단장은 사망했고, 우에다 겐키치 육군 중장과 시게미쓰 마모루 주중일본공사는 다리 하나씩 절단을,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중장은 한쪽 눈이 실명되는 등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상해 점령으로 축제분위기였던 일제에게 윤 의사가 폭탄을 투척해 위축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1차 상해사변은 1932년 5월 5일 정전협정을 맺음으로 사변이 종결됐다. 윤 의사로부터 치명타를 크게 입은 일제가 전쟁을 더는 치를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2차 상해사변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37년 8월 일제가 상해를 재침략하면서 벌어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윤 의사의 이 의거는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큰 획을 그은 대사건이었다. 겨우 이름만 유지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를 소생시킨 것은 물론 중국인들의 마음까지도 사로잡았다. 당시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큰 감동을 받아 제2차 세계대전 말 전후처리문제를 사전협의하기 위해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창했다. 이로 인해 2차 세계대전 종식 후 식민지 국가 중 유일하게 조선만이 바로 독립될 수 있게 됐는데, 그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윤 의사의 상해의거였다. 또한 폭탄을 제공해주는 등 배후에서 도운 김구 선생 역시 상해의거로 인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독립운동의 지도자이자 거목으로 우뚝 서게끔 하는 계기가 됐다.
상해사변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원수를 대신 갚아준 윤 의사의 장거(壯擧)에 열광하며 지금까지도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특히 1989년 10월 상해시위당사자료정집위원회에서 발행한 ‘상해인민혁명사화책’에는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윤봉길 의사만 혁명가로 이름을 올렸다. 또한 중국 정부는 1994년 루쉰공원(홍구공원) 내에 윤봉길 의사 상애사적 자료전시관인 ‘매헌’을 건립비용 전액을 부담해 건립했고, 이 전시관 앞에서 매년 의거일에 한중 합동 의거 기념식을 30년 이상 거행해 오고 있다.
사진을 보면 윤 의사가 얼굴에 피를 흘리며 연행되고 있는데, 이는 거사 직후 일제 헌병대에게 붙잡히는 순간 얼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구타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 사진을 놓고 한때 윤 의사가 아닌 것 같다는 진위논란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또한 사진에는 도시락 폭탄이 땅에 떨어진 모습이 나오는데, 이는 윤 의사가 미처 던지지 못한 폭탄이다. 윤 의사는 2개의 폭탄(물통, 도시락용)을 준비해 물통 폭탄을 던져 성공시켰고, 나머지 도시락 폭탄은 재차 던지려는 중에 일제군에게 제압당해 사용하지 못했다. 물통용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기에 지금까지도 윤봉길 의사하면 도시락 폭탄이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상해 전승 축하를 위해 입장하는 일제 군 수뇌부들의 모습은 축제 분위기를 조선의 한 청년이 쑥대밭으로 만든 위대함을 엿볼 수 있다. 윤 의사는 5월 25일 상해 육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후 일본 오사카 형무소로 호송됐고 12월 19일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시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그의 나이 불과 24세였고, 두 어린 아들과 부인을 뒤로 하고 나라를 위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