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공공버스로 사용된 승합차(1903년). 1900년대 초 당시 수입된 승합차로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FORD)사에서 대중적으로 성공한 모델 T형이다. 이 자동차는 택시나 공공버스(9인승)로 사용됐으며, 경북에서 3대가 먼저 운영된 것이 버스 영업의 시초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는 1911년 왕실과 총독부로 들어온 리무진 승용차 2대다. 하지만 이 사진을 통해 이전에 이미 자동차가 수입돼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3년 고종 재위 40주년을 맞아 포드사의 T형 자동차가 최초로 돌아왔다는 설(說)을 뒷받침해주는 사진인 셈이다. 사진은 무악재에서 시운전하며 기념촬영하고 있는 모습이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4.23.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1900년대 초 우리 선조들의 교통수단은 어땠을까. 구한말인 1900년부터 일제강점기 직전의 모습들을 담은 기록사진을 공개한다.
이 사진은 故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가 40여년간 전 세계를 돌며 자신의 사재를 팔아 모은 귀중한 사진들이다.
사진을 보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한때는 시민들의 발이었고, 당시의 문화를 보여주는 진귀한 교통수단이었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전차와 승합차가 등장해 조선의 근대화가 우리 안에서 자주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사진들이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발언을 심심치 않게 하고 있다. 이는 아직도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우리 스스로가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임을 부정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번 사진을 통해 식민지 이전에도 서구문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나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한강과 제물포 여객선(1900년대). 증기와 황포돛을 이용해 한강에서 인천 제물포까지 왕래하던 증기범선이다. 뱃머리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무역회사 세창양행(마이어양행) 설립자인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에드워드 마이어다. 1883년 인천이 개항되자 서양 무역 회사로는 최초로 인천 제물포에 지점을 설립했다. 제물포 외에도 중국 상해와 천진, 홍콩, 일본 고베 등에 지점을 두고 동아시아 무역에 진출했다. 고종황제의 총애를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속 증기범선은 마이어의 전속 범선으로 보인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4.23.
경북 금호강의 나룻배(1910년). 큰 강이나 깊은 냇가 등에서 사람이나 짐을 건너편으로 이동시키는 교통수단의 하나인 나룻배다. 나루터는 규모에 따라 진(津) 또는 도(渡)라고 했으며, 이곳에 배치된 나룻배를 진선(津船) 또는 도선(渡船)이라고 불렀다. 사진은 자동차(美 포드사 모델T)를 배에 싣고 건너는 모습이다. 당시 나룻배는 사람이나 짐, 자동차 등을 실어 나르기도 했지만 주로 소와 같은 가축들을 반대편 기슭에 건네주는 역할을 했다. 강을 끼고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운송수단이었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9.16.
초헌을 탄 장군(1900년대). 초헌은 세종대왕 시기 만들어진 조선만의 독자적이고 나름 획기적인 것으로 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는 수레다. 종2품은 도지사나 광역단체장급의 벼슬이며, 무관은 정2품(군단장) 이상이 탈 수 있었다. 초헌은 무엇보다 채가 아주 길고 외바퀴가 밑으로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바퀴에는 쇠를 덧입혀 강도를 높였으며, 앉는 곳은 발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제작됐다. 두 개의 긴 채를 각각 앞뒤에서 잡아끌고 밀게 되어 있으며, 보통 6~9명이 한 조를 이룬다. 사진 속 초헌은 4명이 끌고 밀게 돼 있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9.16.
가마 타고 나들이(1903년). 사진 속 가마를 들고 가는 모습을 자세히 보면 앞에 있는 가마꾼(교군꾼)과 뒤에 있는 가마꾼의 모습이 조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뒤에 있는 가마꾼이 더 젊으며, 무엇보다 신발에서도 차이가 난다. 앞선 가마꾼은 맨발에 짚신을 신었다면 뒤에 있는 가마꾼은 덧버선을 필히 신어야 했다. 가마에 시야가 가려져 앞은 물론 가마 아랫부분도 시야 확보가 안 돼 돌부리와 같은 장애물에 발을 다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마 옆에서 태극선(부채)을 들고 있는 여인은 가마를 타고 있는 몸종으로 보이며 가는 동안 틈틈이 부채로 더위를 식혀주곤 했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9.16.
4인교 탄 병조 (1900년). 사인교는 가마의 한 종류로 앞, 뒤에 각각 두 사람이 메고 가는 형태다. 주로 판서와 같은 고위 관리가 타거나 혼례 시 신랑은 말을 타고, 신부는 가마를 탔다. 신랑, 신부가 모두 가마를 타기도 했다. 이때 신부의 가마에는 채색을 하거나 술을 달기도 하고, 잡기를 쫓기 위해 가마 위에 호랑이 가죽을 얹기도 했다. 사진 속 사인교에는 표범 가죽(보통 호랑이 가죽)이 깔린 것으로 보아 정2품 이상의 무관으로 보인다. 4인의 교군 외에도 단도를 찬 네 명의 호위병과 몇 사람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9.16.
첫 신혼길 나들이(1900년대). 2인교 가마를 탄 새 신부의 모습이다. 뒤에 있는 가마꾼은 시야가 가려지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장애물로부터 발을 보호하기 위해 덧버선을 신발 위에 덧신었다. 가마는 앞쪽보다 뒤쪽의 끌채(가마채)가 더 길며 채를 잡는 위치도 앞 사람보다 길게 뒤로 잡는다. 이는 시야를 어느 정도 확보하기 위해서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9.16.
외국공사 전속 가마꾼 (1904년). 사진 속 인물이 선교사인지 외국공사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체격이 크다보니 그 무게에 끌채(가마채)가 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나무로 만들어진 의자는 발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겨울의 추운 날씨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사진 속 인물은 무릎 담요를 덮고 있으며, 손에 여성용 핸드백이 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사진을 찍어준 사람은 아마도 그의 아내인 듯하다. 당시 사진은 외국인이 아니면 찍기 어려웠다. 뚜껑이 없고 의자 같이 생긴 가마를 ‘남여(籃輿)’라고 하는데 의자 모양의 몸체에 기다란 끌채(가마채)가 양 옆에 앞뒤로 길게 뻗은 것이 특징이다. ‘남여’는 본래 왕과 세자가 궁궐 밖이나 궁궐 안 가까운 거리를 갈 때 이용하거나 나이가 든 재상이나 대신도 타고 다녔다. 사진 속 가마와 흡사 ‘남여’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재료나 그 용도에서는 차이가 있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9.16.
미국 푸트공사 등청(1886년). 1833년 5월 12일 초대 미국전권 공사(주한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 1826~1913)가 입국했다. 이는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른 것으로 조약의 체결은 1882년 5월 22일, 비준은 1883년 1월 9일 이뤄졌다. 푸트공사의 통역은 윤치호가 맡았다. 푸트는 고종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가 사절단 파견을 환영한다는 의향을 전했고 고종은 여기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조선정부는 1883년 7월 미국에 보빙사(報聘使, 報聘은 답례로서 외국을 방문하는 일)를 파견했다. 사진은 4인교 가마를 탄 푸트공사가 등청하는 모습이다. 사람의 무게에 긴 끌채(가마채)가 휘어져 있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9.16.
종로 전차 대기소(1903년). 전차는 이같이 남자와 여자의 좌석(좌측 남자, 우측 여자)이 구분되기도 했다. 중앙 칸막이에는 양반들만 탈 수 있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특실과 같다. 남녀 좌석의 구분은 당시 풍습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개통 초기에는 극심한 가뭄과 5~6세의 어린이가 전차에 치여 죽는 사건도 발생하자 이에 흥분한 시민들이 전차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독립신문 1899년 5월 27일자 기록).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9.16.
시민의 발 한성전차(1904년). 사진은 남대문 전차다. 전차는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운행했다. 동대문과 흥화문(옛 서울고교 자리) 구간 개통된 것이 처음이다. 개통 초기에는 교통수단보단 진기한 체험을 해보려고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전차를 타기 위해 일부러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도 있었고, 온종일 전차를 타는 이도 있었다. 1900년대 초에는 정류장이 없어 손을 들기만 하면 태웠다. 사진을 보면 전차 지붕에 광고판도 등장했는데 은단이나 캐러멜 등이 광고판을 장식했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