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사실 군사용이면서 동시에 외교용이다. 미국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져 체제담보만 된다면 핵무기 개발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 정설이다. 우리는 여기서 꼭 21년 전의 제네바합의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제네바 합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이 1994년 10월 21일 맺은 외교적 합의이다. 이 합의는 2003년 전격적으로 파기되었다. ‘북한과 미국 간에 핵무기 개발에 관한 특별계약’, 영어 정식 명칭은 ‘Agreed Framework betwee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다. 북한의 핵개발 포기, 북미수교, 북한에 대한 에너지 공급을 주 내용으로 한다.
북한은 제네바합의 이후 NPT에 복귀하고 핵시설을 동결했으며 대신 미국으로부터 매년 중유 50만t을 공급받았다. 또한 한·미·일이 참여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설립해 경수로 원자로를 짓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2002년 북한이 원심분리 방식의 핵무기 개발사실을 시인하면서 2차 핵위기가 발생해 경수로 건설은 중단되고 미국의 중유지원도 중단됐다. 이에 북한도 NPT를 탈퇴하고 핵시설을 가동하기 시작해 제네바합의는 파기되었다.
북한의 변명도 있다. 북한의 변인 즉 미국이 북미관계 정상화, 이 핵심 어젠다를 미국이 깼다는 것이다. 북한이 말하는 정상화란 북미 간의 평화협정을 말하는데, 미국이 평화협정 체결을 반대했다고 한다. 북한에 대한 위협중단, 이 역시 미국이 합의를 위반했다. 북한이 말하는 위협중단이란 한미연합훈련의 영구적 중단을 말한다. 미국은 계속 핵무기를 탑재하고 한국에 와서 한미연합훈련을 계속했다. 핵무기를 탑재하고 와서는 방어훈련이라서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북한에 대한 핵무기사용 중단, 미국이 합의를 위반했다. 한국에 대한 핵우산 중단을 선언하는 것에도 반대했고, 매년 계속 핵무기를 싣고 한국에 와서 북한을 가상적으로 설정한 군사훈련을 했다. 제네바 합의의 핵심은 북한의 비핵화와 미국의 대북관계 개선이었다. 한미연합훈련도 계속됐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도 폐기되지 않았고, 한미핵우산조약도 폐기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이 한 일이라고는 중유를 약간 제공한 것 말고는 모조리 합의를 위반했다. 북한도, 미국이 이렇게 나오자, 비핵화를 더 진행하지 않았다.
북한의 일관된 주장은 “한반도 전체의 비핵화”이며, 이 뜻은 한미연합훈련 금지, 한미상호방위조약 폐기, 한미핵우산조약 폐기, 북미평화조약 체결, 북미수교를 말한다. 이와 같은 상황을 둘러싸고 언론과 북한문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제네바합의 붕괴의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제네바합의 붕괴에 대한 북한과 미국의 외교적 공방과 관찰자들의 논란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두 가지 점은 이 문제의 책임 소재를 양국 정부 차원으로 파악하고, 그 시점을 북한의 핵개발 시인 파문 혹은 부시정부 등장으로 잡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와 같은 지적에는 제네바합의 자체가 붕괴의 씨앗을 배태하고 있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으나, 그것은 제네바합의의 의의를 과소평가하고 합의 붕괴를 사후적으로 합리화하는 논리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북한의 김정은은 올해 제4차 핵실험으로 핵무기 보유를 공식화 하느냐, 아니면 일단 위장 핵군축제의로 위기를 모면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벌써 위장 핵군축설이 나오는 걸 보면 김정은이 얼마나 다급한지 눈치 챌 수 있다. 우리 정부는 다가올 수도 있는 이와 같은 제네바합의 ‘제2부’ 상황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