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김정은은 현재 120만의 정규군 중 약 20만 내지 30만 명을 감축하여 시베리아 개발에 노동력으로 투입하려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바로 이 점이 푸틴의 신동방정책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즉 김정은은 개발독재를 통해 근대화를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의 방식을 따라 광부와 간호사 대신 젊은 노동력을 러시아에 수출하고 무기와 외화를 벌겠다는 것이다.
이 발상은 다소 허황되지만 예상보다 실익이 있을 수 있다. 김정은은 벌써부터 군대를 전략군 형태로 개편하면서 병력집약적인 군대를 기술집약적인 군대로 개혁하기 위한 청사진을 제시한 바 있다. 그 대표적 정책이 이른바 핵무력건설과 경제건설을 병진한다는 ‘제2의 병진정책’이다.
까놓고 말해 현재의 북한 무기체계를 가지고 대한민국과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리어카와 오토바이의 경주처럼 무의미하다. 북한군은 향후 4~5년 후면 대한민국 공군의 주력기가 될 F-35에 전율하고 있다. 며칠 전 러시아는 스텔스 기능을 가진 수호이-35 24대를 중국에 판매했다. 북한은 군침만 삼키고 있을 뿐 그런 비행기를 단 몇 대라도 사 올 외화가 없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선언한 북한에 대한 경화결재 요구는 아직도 그 효력이 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도와주지 않는 한 향후 4~5년이면 남북한의 밀리터리 밸런스는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김정은에게 생존의 길은 그가 누구이건 손을 벌리는 자에게 안기는 것뿐이다. 마침 푸틴이 신동방정책을 선언한 가운데 크림반도 문제로 외톨이가 되고 있는 고민을 간파하고 잽싸게 그의 품으로 달려들려 하고 있다.
자신의 관리를 떠나 러시아의 품으로 안기려는 북한을 바라보는 중국의 심기는 불편하지만 국제정치는 냉정한 것이다. 김일성은 생전 중국과 소련의 사이에서 적당한 등거리 외교로 북한을 안전하게 유지했지만 오늘 김정은은 모든 것이 화급한 실정이다. 중국이든 러시아든, 심지어 일본이든 상관없다. 오로지 자신의 체제재생산에 이익을 주는 나라라면 그것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가리지 않겠다는 것이 김정은의 잡식성 체제유지 방식이다.
모스크바는 해방 직후 북한에 소베트식 정권을 탄생시킨 산모요, 김일성 정권은 그 사생아였다. 내년이면 광복 70주년이다. 이 역사적인 시점에서 다시 김정은이 모스크바로 접근하는 것은 불길하다. 향후 70년 김씨 정권이 더 갈 수 있다는 징조는 아닌가 말이다. 물론 김정은 정권이 러시아식 페레스트로이카로 달라질 수 있다면 중국의 덩샤오핑식 개혁 개방보다 크게 나쁠 것은 없다. 다만 통일의 길이 그만큼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가 커지는 것이 불만이다.
북한의 신북방정책과 푸틴의 신동방정책은 두 체제를 더욱 견고하게 링크시킬 것이고, 그렇게 될 경우 북한의 시장은 러시아가 독점하게 될지도 모른다. 벌써부터 철도와 항만 등 사회 인프라를 러시아가 장악하기 시작했다. 향후 노동력과 광물 등 러시아가 노리는 것은 얼마든지 북한에 있다. 여기에 수산자원과 관광자원 등도 러시아의 수중에 통째로 들어갈 수 있다. 정부는 속히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청사진을 마련하고 5.24조치 해제 등 북한을 유인할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통일대박은 언어로만 창궐하는 가운데 우리의 반쪽 체제가 대국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있는 현실 속에 먼 산 바라보듯 하면서 한 해를 보내야 하는 이 순간이 통탄스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