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참전유공자회 이철옥 성동구지회 사무국장
[천지일보=임문식 기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강화도 강화읍. 쾅쾅! 그는 고막을 찢는 소리에 눈을 떴다. 캄캄한 새벽에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와 함께 들리는 천둥소리는 다른 때보다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침에 깨어난 그는 눈앞의 광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동네는 보따리를 짊어지고 어디론가 내달리는 주민들로 난리통이었다. 밤새 들린 천둥소리는 인민군의 침공을 알리는 포성이었다. 갑작스러운 포격에 온 동네가 혼비백산했다. 경찰서는 텅 비었고, 바닥엔 소총들이 나뒹굴었다.
6.25참전유공자회 성동구지회 사무국장인 이철옥(80) 씨가 겪은 6.25 전쟁은 이렇게 시작했다. 이 씨는 1934년 이북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태어났다. 그가 가족을 뒤로하고 홀로 38선을 넘을 때만 해도 북한과의 인연은 끝인 줄 알았다. 가족의 생사는 지금도 모른다. 다만 북한 당국이 월남자가 있는 집안을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서해의 섬 강화도에 혈혈단신 살던 그는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내던져졌다. 이 씨는 당장 강화도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피난 갈 배가 없었다. 공무원들이 이미 배를 모조리 타고 섬을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포위된 상황이었다.
이대로 당할 순 없었다. 그를 포함한 몇몇 청년이 텅 빈 경찰서로 달려갔다. 바닥에 버려진 칼빈 소총을 주워 무장했다. 경비용으로 쓰이던 것이었다. 24명의 청년은 게릴라 부대를 만들었다. 이른바 ‘을지병단’이었다. 이 씨는 국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을지병단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다. 낮에 야산에 숨었다가 밤에 급습하는 작전으로 인민군을 괴롭혔다.
당시 마을은 북한 정치보위부와 손잡은 ‘남쪽 동조자’들이 장악했다. 전쟁이 나기 전부터 북에 포섭돼 간첩활동을 벌이던 이들은 전쟁 발발과 함께 본색을 드러냈다. ‘민청’ 완장을 차고 정치보위부와 함께 의용군을 차출하고 청년들을 강제로 공산당에 가입시켰다. 마을을 신속하게 북한 정치 체제로 바꾸는 게 이들의 역할이었다. 그들은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주민을 살해하는 등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 씨는 “그들은 마을에서 철수하면서도 농사짓는 여자들마저 다 쏴 죽이고 갔다”며 치를 떨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희생자 가족 중엔 피난을 갔다가 9.28 수복 당시 전투경찰이나 군인이 돼 돌아온 이도 있었다. 이 씨는 “그들이 자기 고향에 와보니 자기 가족이 살해된 것을 알고 가만히 있었겠나. 북쪽으로 도망가지 못한 민청 활동자 가족에게 보복했다”고 증언했다. 상황이 역전된 것이었다.
전쟁의 참화. 그 현장에선 가해자도 피해자도 따로 없었다. 강화도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지켜봐야 했던 그는 “과거사야 어찌 됐든 서로 용서하고 화해했으면 한다”며 “역사 속에 남기자”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