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산 화동양행 이제철 대표 ⓒ천지일보(뉴스천지)

풍산 화동양행 이제철 대표

‘머니가 뭐니라고 물으면 눈물의 씨앗이라 하겠어’왁스 2집 머니(Money)의 가사다. 장기 불황 속에서 공감백배인 말이지만 머니 입장에선 억울한 일일 수도 있다. 머니는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유물’이자 ‘기록물’의 측면도 있으니까. 풍산 화동양행 이제철 대표를 만나 화폐의 역사 문화적 가치에 대해 들어봤다.

그는 중앙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해 동아건설 원자력부에서 근무했다. 사우디, 리비아 등 공사현장을 누비며 1계급 특진에, 월급도 대폭 올라갈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짐을 싸서 직원 다섯 명 남짓한 작은 사무실로 직장을 옮겼다. 동아건설의 상사와 동료, 친척 모두 하나같이 ‘미친놈 중에 미친놈’이라 했지만 이미 정한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 그리고 젊음을 담보로 달렸다. 일주일 동안 밤을 꼴딱 새도 피곤한줄 몰랐다. 30대 잘나가던 청년이 들어갔던 회사는 그 이름도 낯선 화폐수집 전문업체 화동양행, 지금의 풍산 화동양행이다.

그를 설득한 건 화동양행의 창업주 이건일 전 회장이었다. 이건일 회장 역시 한양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공학도다. 그런데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화폐와 관련된 3천 년 동서양의 역사와 주조 지식을 거의 섭렵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이 회장에게서 들었던 세상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세상이었다. 화폐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뿐 아니라 그 나라 최고 기술진과 디자이너가 만나 탄생하는 화폐에 청년 이제철은 매료됐다.

1986년 그렇게 화동양행에 첫발을 내디뎠고 27년 동안 묵묵히 한길을 걸었다. 그리고 2004년 이 회장으로부터 “화동양행은 내자존심이다. 자존심을 지켜 달라”는 말과 함께 최고경영자가 되어 책임을 맡고 있는 상태. 지난 2012년에는 주화용 소전(음각을 넣기 전 반제품 동전) 제조업체인 풍산그룹이 화동양행을 인수, 자회사로 편입해 공식 회사명은 풍산 화동양행이다. 전 세계 20여 개 주요 조폐국의 한국 내 판매권자인 풍산 화동양행은 현재 온오프라인 시장에서 세계 각국의 화폐나 기념주화를 국내에 소개하는 다리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 십이간지 말의 해 기념주화들 (자료제공: 풍산 화동양행)

◆나라님 걱정 유별났던 흔적이 ‘별전’에 고전화폐 수집은 ‘역사 수집’이다

‘천만년이 다되도록 영원토록 덕망의 향기를 세상에 펼치소서’ 조선별전에 새겨져있는 ‘어천만년 세세생향(於千萬年 世世生香)’이란 글의 뜻이다. 별전은 엽전 시제품의 일종이었다. 완제품 압박이 덜해서였을까. 시제라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한껏 멋을 부린 별전은 다양한 형태로 주조돼 애장품이나 패물로 사랑을 받았다.

“구도, 도안, 세공까지 단연 최고죠. 요즘에도 이렇게 구멍을 낸다는 게 쉽지가 않은데 당시는 주물로 만들었거든요. (중국, 일본의 별전과) 비교가 안 돼요. 안에 담고 있는 의미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서 어르신들께 가끔 ‘표준한국별전·열쇠패 목록’책을 드려요. 시간되실 때 한번씩 보시라고요. 좋은 뜻이 얼마나 많은지요.”

정말 그랬다. 별전에 새겨진 한자성어들은 개인의 장수나 가정의 평화를 바라는 내용뿐 아니라 국가, 나라님에 대한 기원도 많았다. ‘어천만년 세세생향’을 비롯해 ‘구오복강녕(九五福康寧)-임금의 오복과 평안, 장수를 기원하다’‘천추만세-(天秋萬歲) 임금이 천년, 만년 동안 장수하기를 기원하다’등 나라님을 생각하는 글귀들이 넘쳐났다.

또 ‘예의염치(禮義廉恥)-예의를 지키고 염치를 지녀야 군자의 자격을 갖출 수 있다’‘금슬우지(琴瑟友之)- 부부간의 금슬이 좋아 마치 친구처럼 지낸다’‘수복강녕(壽福康寧)-오래 살고 복되며 건강하고 편안하다’등 인격수양과 가정의 화목을 위한 다양한 표현들을 담고 있었다.

“조선시대 상평통보가 나올 때 주조된 게 별전인데 이런 좋은 글귀들이 새겨져있다는 것이 대단히 자랑스러워요. 우리 조상들이 이런 정신세계, 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곧 우리의 국력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요.”

화폐 속에는 문화뿐 아니라 역사의 희로애락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때 지폐 금권 100원의 도안에 일본의 부엌신 대흑천상이 그려져 있고, 구한말 30여 년 동안 근대주화가 50여 개나 만들어졌다. 격변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화폐도 역사를 반영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중세시대 암흑의 그림자는 화폐에도 드리워져 주화의 두께가 양철판 정도로 얇아지고 귀금속의 순도는 낮아졌으며 색깔은 대부분 어두웠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기계가 돈을 찍기 시작하면서 돈의 모양새 자체가 바뀌었고 섬세하고 복잡한 도안도 표현할 수 있게 됐다. 이처럼 엽전이나 별전, 옛날 지폐 등 고전 화폐의 수집은 ‘역사를 수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공부도 해야 하니 그만큼 성취감도 남다르게 된다.

◆기념주화 가격 경쟁력 갖출 때 문화수준 격상될 것

수집은 동서양의 옛날 돈뿐 아니라 올림픽, 월드컵, 동식물, 건축물 등 주제별로 다양한 현재의 기념주화도 포함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열렸던 88서울올림픽에선 당시 32종의 주화가 발행돼 국내 화폐수집 활성화에 큰 기여를 했다. 최근엔 각국에서 앞다투어 발행하고 있는 십이간지 시리즈가 인기다. 올해는 청마의 해로 전통적인 느낌의 캘린더 메달을 제작해 판매하고 있는데 십이간지는 12년 동안 꾸준히 수집해야 하니 기다림을 요하는 수집분야이기도 하다.

화폐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 수집의 재미, 그 가치도 알만한데 ‘제왕의 취미’라고 불리는 화폐 수집을 일반사람들도 즐길 수 있을까.

“지금 호주머니 속에 있는 10원, 50원, 100원부터 모으면 돼요. 다 수집 가치가 있는 것이거든요. 또 화폐의 가치는 희소성, 인기도 그리고 보존 상태에 따라 달라져요. 참고로 ‘5’가 들어간 화폐를 한 번 모아보세요. ‘5’는 보조화폐이기 때문에 많이 안쓰이거든요. 그러니 희소성이 있죠. 그래서 은행의 지점장님 가운데 해마다 5천원, 5만원 신권을 한 다발씩 보관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풍산 화동양행은 주화를 발행하는 기관은 아니다. 세계의 조폐국에서 발행하는 기념주화와 수집용 화폐를 국내 시장에 소개하며 화폐시장의 저변확대를 꾀하고 있는 회사다. 그래서 화폐수집가들을 위해 코인클럽을 운영하고, 월간 화동뉴스를 만들어 화폐계의 동향과 최신 소식 등을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러시아 중앙은행이 발행한 ‘2014 소치 동계 올림픽’공식 기념주화를 유통시켰고, 비엔나 필하모닉 ‘불리온 주화(Bullion Coins)’를 선보여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도 했다.

세계의 조폐국들은 국내 화폐시장보다 기념주화 발행이 수월한 편이라 국가 간에 동일한 주제로 만들어진 기념주화의 경쟁이자연스럽다. 반면 우리나라는 법률적으로 주화발행이 제한돼 있어 화폐수집 시장 또한 크지 않다. 독도 수호의지 표명(2005년, 우간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추모(2009년, 라이베리아), 김연아 선수 금메달 수상(2010년, 투발루) 등의 기념주화 뒷면에 다른 나라의 상징물이 새겨졌던 이유 역시 외국에서 제조한 외국화폐를 국내에 유통했기 때문이다.

▲ 하계올림픽 기념주화. 왼쪽부터 시드니(2000), 아테네(2004), 베이징(2008), 런던(2012)올림픽 (자료제공: 풍산 화동양행)

기념주화 앞뒷면을 한국의 상징물로 채우려면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기념주화 발행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은행은 연간 4건 정도의 기념주화를 발행하고 있다. 캐나다(연간 100건)와 프랑스(연간 60건)는 물론 가까운 일본(연간 12건), 중국(연간 10건) 등에 비해서도 굉장히 저조한 편이다.

“경쟁력 있는 상품이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나온다면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 예술성을 홍보하는데 나쁠 게 없잖아요. 게다가 수출까지 하게 되면 외화도 벌 수 있고요. 우리나라는 예부터 예술적, 기술적 자질이 충분하기 때문에 화폐 역시 세계시장에서 경쟁해도 살아남으리라 믿습니다. 88올림픽 이후 30년이 지난 시점인 2018 평창동계올림픽 때는 전 세계가 인정할 만한 기념주화를 선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라선 대한민국, 이제 그 문화적 우수성을 보여주는 척도는 기념주화 발행에 있으리라 봅니다.”

이 대표는 국내 화폐시장이 더 확대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치는 한편 유통 및 마케팅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우리가 기념주화를 발행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면 어떤 화종을 몇 개 만들어야 하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홍보해야하는지 등은 풍산 화동양행이 다년간 쌓아온 노하우를 통해 얼마든지 제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화폐 수집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전 세계의 문화와 역사를 아주 적은 공간에 모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고급 취미다”라며 “성숙한 화폐시장을 위해 수집가와 화폐발행기관, 공인기관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미혜 기자 mee@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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