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좌)이불란사 토제 불감 우)이불란사와 천추다업을 적은 명문
좌)이불란사 토제 불감 우)이불란사와 천추다업을 적은 명문

고구려 불교전래와 발전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4세기 후반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375년 삼국 최초의 사찰인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가 건립되었고, 393년에는 평양에 아홉 개의 사찰이 창건되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다음은 조선말 한양(漢陽) 박영선(朴永善)의 <조선선교고(朝鮮禪教考)>의 기록이다.

‘고구려소수림왕이년(高勾麗小獸林王二年). (진간문제함안이년(晉簡文帝咸安二年)) 진왕부견(秦王苻堅). 견부도순도(遣浮屠順道). 재송불상경문(齎送佛像經文). (하륙월(夏六月)) 왕견사회사시(王遣使回謝時). 고구려도(高勾麗都). 재평양동황성(在平壤東黃城)○후이년(後二年). (소수림사년(小獸林四年)) 승아도래(僧阿道來). (건원십년(建元十年)) 월명년춘(越明年春). 시창초문사(始創肖門寺). 이치순도(以置順道). 우창이불란사(又創伊弗蘭寺). 이치아도(以置阿道) (춘이월(春二月))○후십팔년(後十八年). 지고국양왕말년(至故國壤王末年) (동진효무시(東晉孝武時)). 우하교숭신불법○후이년계사(又下教崇信佛法○後二年癸巳). 광개토왕(廣開土王). (진효무대원십팔년(晉孝武大元十八年)) 창구사어평양(創九寺於平壤)(추팔월(秋八月))○안(案).

소수림왕시(小獸林王時). 연주모용위(燕主慕容煒). 강어부견(降於苻堅). 료동지로(遼東之路).어시득통(於是得通). 차진승소이지구려야(此秦僧所以至勾麗也). 구려(勾麗). 수불이십여년(祟佛二十餘年). 기후절무성적자백여년(其後絕無聲跡者百餘年). 지문자명왕칠년(至文咨明王七年). 경유창사지문(更有創寺之文). 삼국사운(三國史云). 구려문자명왕칠년정축(勾麗文咨明王七年丁丑). (남제폐제시(南齊廢帝時)) 창금강사(創金剛寺)(추칠월(秋七月))○안(案). 평양구사지후(平壤九寺之後). 일백오년(一百五年). 시창금강사(始創金剛寺). 기간건사(其間建寺). 의불지차(宜不止此). 사불진기야(史不盡記也).’ 

도판·사진의 토제불감(土製佛龕)은 민간 수장으로 고구려 불교도입 초기 이불란사의 조형물로 보이며 ‘불토천추 대업(佛土千秋 大業)’을 기원한 명문이 있어 매우 중요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불감은 3단의 대좌위에 감실을 마련하고 그 안에 좌상의 불상을 봉안한 특별한 예다. 대좌의 앙복련은 북위시기 유행한 판단(瓣端)이 뾰족한 모양이다. 원통형의 감실은 전면에 여의창(如意窓)을 마련해 안의 부처가 잘 보이게 했다. 안의 좌불도 2단의 앙복련 좌대에 안치 되었는데 외면의 연화대좌 문양과 같다.

소수림왕 시기에 고구려가 전진을 통해 불교를 수용하였던 배경에는 고구려와 전진과의 우호적인 관계가 작용하였다. 즉 370(고국원왕 40)년에 전진에 의해 연이 멸망하자 전연(前燕)의 모용평(慕容評)이 고구려에 망명하였는데, 고국원왕은 그를 잡아서 전진으로 보냈고 이로써 양국은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전진의 왕 부견은 불교를 매우 숭상하였으므로 고구려에 불교를 적극적으로 전하였다.

한편, 당시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369(고국원왕 39)년에 백제군에 패배하였고, 371(고국원왕 41)년에 백제가 평양성을 공격하자 교전 중에 왕이 전사하였다. 이러한 대외적인 위기 속에서 소수림왕이 즉위하여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을 설립하고 율령을 공포하였다.

따라서 소수림왕 시기의 불교 수용과 공인은 고구려의 대내외적인 상황 속에서 국가체제 정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화리 절터 앞 구릉 공사장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
신화리 절터 앞 구릉 공사장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

무수한 적색기와 편린

글마루 취재반은 지금은 경작지가 된 절터에서 많지 않은 적색 기와편과 장방형(長方形) 전(塼)의 잔해를 수습했다. 전은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고식이 분명하다. 절터는 어디가 법당 터이며 어디가 강당지인지도 알 수 없이 파손되었지만 천수백년 기와편으로 고구려 향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문화재 당국이 불상이 발견되었을 당시 유지를 보존조치하지 않은 아쉬움이 남는다.

남한 지역에서 확실하게 고구려 절터가 찾아진 곳은 많지 않다. 지난 70년대 중반 고(故) 정영호 박사가 이끄는 단국대 학술조사단이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에서 고구려와 당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와당 중 가장 아름답고 힘찬 연화문이었다. 정 박사의 주장에 반해 이 와당을 백제계 혹은 신라계로 내다보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고구려 와전을 집필하면서 서울의 한 수장가가 소장하고 있는 중국 지안 출토 와당 가운데 탑평리 유물과 닮은 것을 한 점 조사할 수 있었다. 여섯 엽의 연화문 끝은 반전돼 있으며 가운데를 눌러 입체감이 돋보이게 했다. 탑평리 와당과 쌍둥이 같았다.

바로 국내성이 있는 지안에서 와당을 만들었던 장인들이 여기까지 내려와 건물을 지으면서 같은 막새를 만든 것인가. 비록 탑평이 와당에 비해 작지만 그 원류를 캘 수 있는 유물이었다. 필자는 작고하신 정영호 박사의 유물에 대한 폭 넓은 지식과 혜안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 광진구 아차성 홍련봉과 연천 호로고루성, 파주 덕진산성 등에서 고구려 와당이 찾아졌다. 이들 와당은 아차산성 출토품을 제외하면 조악하며 급히 만든 것이어서 품격이 떨어진다. 고구려가 한창 신라와 전역을 치르는 시기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와당이 찾아진 성지(城地)는 고구려 지배층이 내려와 진주했거나 사찰이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충주 탑평리는 고구려비가 세워질 만큼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와당도 매우 훌륭하고 아름답다. 다른 유적에서 찾아진 고구려 와당들과 질 면에서 비교된다.

양평군 강상면 신화리 사지는 고구려 전성기 매우 중요시했던 가람이 아니었을까. 금동불상의 크기나 품격으로 미루어 규모가 큰 절이 잡았을 것으로 상정된다. 어딘가 화려하고 힘찬 고구려 연화문이 묻혀 있을 것이다. 그 연화문은 여기서 배를 타면 한걸음에 당도하는 충주시 남한강 변 탑평리 사지출토와당을 닮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 답사에서는 잡초가 우거져 와편을 조사할 수 없었다.

중국 대륙에서 남북조로 나뉘어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시기. 고구려·백제·신라도 영토전쟁으로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양평 금동미륵여래입상은 평화를 염원하는 상징으로 고구려 민초들의 미래불로 창조된 것이다.

글마루 취재반과 한국역사문화연구회 답사반은 절터 앞 택지 조성현장 파괴된 홍적토층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을 확인하는 개가를 올렸다. 몸돌에서 떼어낸 격지와 밀개, 긁개, 슴베 찌르개 등을 찾았다. 그리고 조질무문토기, 흑색토기편도 수습했다. 고구려 가람 이전 선사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신화리 사지에서 수습된 방형(方形) 전(塼)
신화리 사지에서 수습된 방형(方形) 전(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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