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산성 성벽
설봉산성 성벽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설봉산 성벽에서부터 수많은 고구려 흔적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고구려가 중요시한 남천현

경기도 이천의 옛 고구려 시대 이름은 남천현(南川縣)이었다. 5세기 후반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아리수를 점령한 고구려군은 이천을 장악하여 남방 공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땅은 6세기 중반 진흥왕대 신라 수중으로 들어가 삼국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주 무대가 된다.

남천은 ‘남쪽의 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 지리지 한주 조(漢州條)에도 고구려시대 남천현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천에서 남천은 어떤 하천을 가리키는 것일까. <여지승람>에는 고적 조에 남천(南川)이 나온다. 고려 태조가 후 백제를 치려했을 때 장군 서목(徐穆)의 도움을 얻어 이 내(川)를 건넜다고 하여 ‘이천(利川)’이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그 내(川)가 남한강 지류인 흥천 혹은 북하천인가.

이천 동쪽에 있는 애련정(愛蓮亭)에는 조선 성종 때 학자 임원준(任元濬)이 쓴 <객관기>가 있다. ‘이천 고을이 고구려 때는 남천현이었는데 뒤에 신라의 영지가 되어 남매군(南買郡)이라 이름하였으며 군주(軍主)를 두어 다스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는 이천을 매우 중요시했다. 백제성의 고지인 설봉산(雪峯山)에 거대한 석성을 구축하여 신라, 백제의 북상을 저지했다. 당시에도 ‘땅은 넓고 기름지며 백성은 많고 부유하다‘는 형승을 중요시했을 게다. 주요한 군사기지가 되어 옛부터 많은 군사들의 왕래가 잦았다. 고려 말 조선 초 문신이었던 이첨(李詹)의 시를 음미해 보자.

시내의 흐름이 온통

말굽의 티끌로 흐려졌으니

북으로 가고 남으로 오는 것이

묻노니 몇 사람인고(溪流渾盡馬蹄塵)

신라 진흥왕은 남천현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이곳에 군주(軍主)를 진주시켰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유명한 ‘남천정(南川停)’이 바로 여기다. 남천정은 신라 10정(停)의 하나였다. 지역이 넓을 뿐만 아니라 국방상 요지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2개의 정을 더 설치한다.

신라군의 군복 빛깔은 황색(黃色)이었다. 뒤에 남천주를 황무현(黃武縣)으로 고친 것은 복색에 연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속군관으로는 장군(將軍), 대관대감(大官大監), 대대감(隊大監), 제감(弟監), 소감(少監), 감사지(監舍知), 대척(大尺), 군사당주(軍師幢主), 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 등이 있었다.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544(진흥왕 5)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한강을 개척하기 전 이곳을 먼저 장악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해는 신라에게는 매우 긴박하고 역사적인 해였다. 그동안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와 국경분쟁이 일어나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한 것이었다. 성왕은 가야세력과 연합하여 신라를 습격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는데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고리산(지금의 옥천)에 오다가 구천에서 신라 복병에 사로잡혀 죽음을 당했다.

진흥왕은 성왕을 잃은 백제가 혼란에 빠지자 때를 잃지 않고 한강유역으로 진출했으며 세력이 약해진 고구려 남방지역인 충북과 경기도 일대의 여러 성들을 공취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수확은 바로 ‘남천현’의 확보였다. 진흥왕은 이곳에 군사력을 집주시켜 고구려의 남하와 백제의 북상을 저지하는 일석이조의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천 설봉산성 고지도
이천 설봉산성 고지도

신라 통일의 전진기지

660년 여름, 신라의 대 백제 공격은 이천 즉 남천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나라 13만 대군은 수 천척의 배를 이용, 중국 내주(萊州)를 출발해 서해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삼국사기>에는 ‘전선이 천리나 뻗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660년 5월 26일 신라는 무열왕을 위시, 김유신 장군과 제장들이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라벌을 떠나 남천정을 향했다. 당시 무열왕을 시위했던 신라군의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남천정으로 떠난 군사의 숫자가 5만 대군까지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군이 왕도를 떠나 남천정에 도착한 것은 22일 뒤인 6월 18일이었다.

당 소정방은 서해 덕물도(德物島)에 상륙하여 남천정에서 떠난 태자 법민을 맞는다. 당시 법민은 전선(戰船) 백 척에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소정방을 맞이했다고 되어 있다.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은 남천정에서 기다린 셈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7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소정방은 법민을 만나 ‘나는 7월 10일에 백제의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사와 만나 백제 의자의 도성을 격파하고자 한다.’고 말하자 법민은 ‘대왕은 지금 대군이 오는 것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터이므로 장군이 왔다는 말을 들으시면 반드시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올 것입니다.’하니 소정방이 크게 기뻐하자 법민은 돌아와서 왕에게 소정방의 군세가 매우 강성한 것을 말하자 왕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김춘추는 회군하여 서라벌로 환궁하지 않고 상주 백화산 금돌성(金突城)에 주둔하게 된다. 김유신 휘하의 군사들은 황간-진안-탄현-황산 길을 택해 소부리로 진격을 했다. <삼국사기>에는 7월 9일 황산에 도착한 것으로 나오는데 남천정에서 이곳까지도 20여 일이 걸린 셈이다.

왕경에서 떠난 군사들과 주둔 군사가 가장 많았던 사벌주(상주), 영동(길동군), 보은(삼년산성), 옥천(고리산) 군사들이 정벌군에 합류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여러 성에서 합류한 군대의 수가 5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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