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지난 2011년 11월 23일 전남 장성군이 420년 만에 복원에 성공한 이른바 ‘변이중 화차’의 모습이다. 이 화차는 망암 변이중 선생이 제작해 행주대첩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공: 장성군청)우)지난 2011년 11월 28일 오전 전남 장성군 동화면 육군포병학교 훈련장에서 망암 화차(火車)의 발사시연이 이뤄진 모습. 망암 화차는 조선시대 망암 변이중 선생이 제작,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화차로 이날 제작된 지 420년 만에 일반에 공개됐다. (제공: 장성군청)

좌)지난 2011년 11월 23일 전남 장성군이 420년 만에 복원에 성공한 이른바 ‘변이중 화차’의 모습이다. 이 화차는 망암 변이중 선생이 제작해 행주대첩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공: 장성군청)
우)지난 2011년 11월 28일 오전 전남 장성군 동화면 육군포병학교 훈련장에서 망암 화차(火車)의 발사시연이 이뤄진 모습. 망암 화차는 조선시대 망암 변이중 선생이 제작,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화차로 이날 제작된 지 420년 만에 일반에 공개됐다. (제공: 장성군청)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죽산 출신 박서 장군의 항몽사적

몽고침입 때 귀주성에서 승리한 박서 장군은 바로 죽산이 낳은 명장이다. <동국여지승람> 고려 인물조에 “박서는 고종 때 사람인데 귀주성을 지켜 공이 있었다. 벼슬은 문하평장사에 이르렀다”고 했다.

박서 장군의 생애 면모를 보면 다음과 같다. 1231(고종 18)년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재임 중 몽고병을 물리쳤다. 그해 9월 몽고군 원수 사르타이(撒禮塔)가 철주(鐵州: 지금의 鐵山)를 함락한 후 구주(龜州: 지금의 龜城)를 공격해 왔다.

박서는 삭주(朔州)의 분도 장군(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 정주(靜州)의 분도 장군 김경손(金慶孫), 정주·삭주·위주(渭州, 지금의 渭原)·태주(泰州, 지금의 泰川)의 수령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구주에 모여 기습작전을 써서 적을 물리쳤다.

1232년 1월 후군지병마사(後軍知兵馬事) 최임수(崔林壽), 감찰어사(監察御史) 민희(閔曦)가 구주성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자 서너 차례 거부하다가 국법을 어길 수 없어 항복하였다. 그 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죽산에 있다가 다시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가 되었다. <고려사> <동국통감> 등 박서 장군의 귀주성 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몽고가 귀주를 공격하자 병마사 박서(朴犀), 장군 김경손(金慶孫) 등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몽고가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중략) 몽고군은 성을 몇 겹으로 에워싸고 밤낮으로 남북의 문을 공격하였으나 성중의 군사가 돌격하여 격퇴시켰다. 몽고 사람들이 위주 부사 박문창(朴文昌)을 사로잡아 성에 들어가서 항복하도록 타이르게 하였는데 박서는 이를 베어 버렸다. 몽고군은 또 정예한 자를 선발하여 북문을 공격하였으나 서는 이를 쳐서 물리쳤다.

몽고 사람들이 또 수레에 풀을 싣고 불을 붙여서 문루(門樓)를 공격하자 박서는 미리 누상(樓上)에 물을 저장했다가 이를 쏟으니 불은 곧 꺼져버렸다. 몽고군이 성을 포위한 지 삼순(三旬) 동안 100가지 계교로 공격하였으나 끝내 이길 수가 없자 이에 물러나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17일(무진)에 몽고군이 다시 큰 포차로 귀주를 공격하였는데, 박서 역시 포차와 비석(飛石)을 발하여 무수히 격살하니 몽고 군사가 둔친 데로 물러나서 책(柵)을 세워 지켰다. 살례탑은 통사(通使)를 보내어 회안공의 첩문을 가지고 항복하기를 타일렀으나 박서가 듣지 않았으며, 재삼 타이르자 박서는 수비를 더욱 굳게 하였다. 몽고군이 운제(雲梯)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려고 하자 박서가 대우포로 맞아 치니 부서지지 않은 것이 없었고 운제도 가까이 올 수가 없었다. 대우포라는 것은 큰 칼날이 달린 큰 병기이다.

몽고군에 어떤 한 노장(老將)이 성루와 기계를 둘러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내가 천하를 돌아보았지만 이렇게 공격을 받고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성중의 여러 장수들은 다른 날 반드시 장상(장상)이 되리라.”

죽주산성 치성 너머로 보이는 마을 전경
죽주산성 치성 너머로 보이는 마을 전경

임진전쟁의 격전지

죽주산성은 임진왜란 중에 왜군의 수중으로 들어가 조선군이 이를 탈환하는 형세로 격전을 치른 전장이었다. 일부 성벽이 오사카 성의 석축을 닮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일본군이 진주했을 당시 일부 허물어진 것을 보축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초토사 변이중(邊以中)이 한양으로 진격하는 도중 죽산성에 진주했던 왜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화차에 의존,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지만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한다.

변이중은 죽산성에서 퇴각하여 그 이듬해 1593년 2월 12일의 행주산성전투에 합류했다. 그리고 권율 장군에게 화차 40대를 지원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효과를 봤다고 한다. 변이중의 문집인 <망암집>에 나와 있는 ‘화차도설’에는 문종 화차에 대한 도면과 설명문, 자신이 개량한 ‘화차도’ 도면이 들어 있다.

화차의 수레 구조는 일반 수레와 같이 차체가 바퀴의 축 바로 위에 올려져 있다. 또 네 방향으로 방호벽을 설치하고 세 방면에 총통기를 달았다. 총통기에는 각 40개의 승자총통을 장착하여 사용하였으며 네 방향의 방호벽에는 각기 1개의 관측 구멍을 설치하여 화차 안에서 밖을 관측하고 조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변이중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8(선조 1)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7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전라도 소모어사가 되어 군비 수습에 힘썼다.

1603년 함안군수를 지내다가 1605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전남 장성에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이이와 성혼의 학통을 이어받아 성리학과 경학에 밝았다.

죽주산성
죽주산성

사적지정 안된 죽주산성

죽주산성은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음성 망이산성처럼 국가적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 성에 대한 학계와 행정당국의 시각도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려 송문주 장군의 항몽전 승리만을 가지고도 이 성은 국난극복의 호국 유적이다.

특히 죽산성은 백제 마한의 고지에다 고구려가 남하하면서 대대적인 석성을 구축한 유적이다. 벽돌처럼 정연하게 다듬은 성돌과 들여쌓기 축성법, 그리고 성안에서 무수히 찾아지는 적색 와편들은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적색 와편 가운데는 음성 망이산성에서 수습한 사격자문, 승석문이 시문 것과 같다. 이는 중국의 고구려 유적인 요령성 성자산성, 요령성, 청석령 산성 출토 와편과 같은 모양이다. 대성인 죽주산성과 신라를 바라본다는 뜻의 망이산성(望夷山城)의 연계성을 밝힐 수 있는 자료다.

이 성은 해발 250m로서 평지와 가깝게 연결될 수 있어 마한 백제시대부터 치소인 읍성(邑城)으로서의 기능도 배제할 수 없다. 성안에서 적색무문토기, 회백색 연질토기 등이 다수 수습되는 것은 마한 백제시기부터 주민들이 살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이 지역을 점령하여 음성 망이산성을 특별히 보강하고 이 성을 포곡식으로 구축한 것은 주변의 비옥한 평야를 장악하고 많은 주민을 수용하기 위함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안의 확대된 발굴조사가 이뤄지면 많은 고구려계 유물의 출토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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