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이산성에서 찾은 ‘토산(土山)’ 명문와
망이산성에서 찾은 ‘토산(土山)’ 명문와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글마루 답사반 ‘토산(土山)’명 수키와 찾아

망이산성 안에서는 다수의 와편이 발굴된 바 있다. 이번 글마루 취재반, 한국역사문화연구회 답사에서도 여러 점의 와편이 확인되었다. 기와 가운데는 안쪽에 직포문(織布紋)이 있는 격자문, 사격자문, 승석문 등 전형적인 고구려계 평와편이 확인되었다.

이들 적색 와편들은 그동안 남한지역 삼국시대 산성에서 수습해온 와편과 닮아있다. 격자문과 승석문 등은 중국 요령성 성자산, 개원시 용만산성, 요령 청석령 산성, 연천 호로고루성에서 출토된 평와편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런데 대학 발굴조사단들은 ‘망이성’의 명칭과 관련 왜 고구려를 생각지 않았을까.

글마루 취재반은 성의 동편 토로 위에서 ‘토산(土山)’이라고 찍은 명문와(크기 12㎝×7㎝)를 찾았다. 두께가 얇은 회색의 외면에 정자로 양출되어 있는 이 명문와는 백제시대 것으로 보인다. 이 명문와로 고대에 토성의 명칭을 ‘토산’이라고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토산은 우리말로 ‘퇴메’이며 고대에 흙을 소재로 쌓은 성을 지칭한 표현이다.

단국대학교 박물관 발굴조사보고서를 보면 이곳에서는 매우 주목되는 명문와편이 출토되었다(3지역 남문터 출입구 3지층). ‘官’ 혹은 ‘大官’명 와편은 세장한 방격자문이 타날된 상면에 고졸한 해서 정자로 찍은 것이다. 대개 ‘大官’가 출토되는 유적은 왕궁지나 이에 딸린 사찰 유적에서 나왔으며 망이산성에서 이 같은 명문와의 출토는 특별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사상 이두문명사 해석법(古史上 吏讀文 名詞 解釋法, 조선사 연구초)>이란 논문에서 ‘대관과 신지(王)’를 동일시한 글을 남겼다.

“(전략) 진수(陳壽) 삼국지(三國志) 삼한전(三韓傳)에 ‘제관(諸官)’을 다 ‘지(支)’라 이름하였다 하며, 그중의 대관(大官)은 신지(臣智)라 명하였다하며, 신지(臣智)를 혹 ‘신운견지(臣雲遣支)’라 칭한다 하였으니 지(智), 신지(臣智), 신운견지(臣雲遣支) 등을 당시에 무엇으로 읽었겠느뇨. 고대에 제소국(諸小國)의 종주(宗主)가 되는 대국을 진국(辰國)이라 하며, 제소왕(諸小王)을 관할하는 대왕을 진왕(辰王)이라 하며, 제소도(諸蘇塗: 神壇)의 종주되는 대소도(大蘇塗)를 신소도(臣蘇塗)라 한바, 신(臣)과 진(辰) 등을 다 ‘신’으로 독할지니, 신은 태(太)의 뜻이며 총(總)의 뜻이며 상(上)의 뜻이며 제일이란 뜻이요, 지(智)의 음은 ‘치’니 관명의 지(支)와 지(智) 등의 글자는 모두 ‘치’로 독할지니 신지(臣智) 즉 신치는 집정의 수상이요 ‘신운견지(臣雲遣支)’의 운(雲)은 하문(下文)의 거운신국(巨雲新國)의 ‘운’을 여기에 첩재한 자니 운자를 빼고 ‘신크치’로 독함이 가하며 신견지(臣遣支)는 고구려의 태대형(太大兄)이요 신라의 상대등(上大等)이니 신크치의 음이 신견지(臣遣支)가 되며 뜻이 태대형(太大兄) 혹 상대등(上大等)이 됨이니라(대형(大兄)의 일명은 근지(近知) (하략)”.

이 ‘대관(大官)’ 명문와는 앞으로 망이산성의 역사적 비밀을 캐고 위상을 찾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 분명하다.

개축된 서문터에서는 ‘준풍사년(峻豊四年)’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단국대박물관 학술보고서). 암키와의 바깥 면에 새겨진 ‘준풍’은 고려 광종 11~14(960~963)년 시기에 해당된다.

광종은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로 ‘노비안검법’을 제정했으며 958년에는 쌍기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도를 실시하기도 했다. 광종은 어머니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충주 호족 유긍달의 딸)의 원찰인 숭선사(崇善寺)를 충주시 신니면에 짓기도 했다. ‘준풍’ 연호는 국보 제41호로 지정된 청주시 용두사지(龍頭寺址) 당간지주 철통의 명문에도 나오고 있다. 이 명문 와편의 확인으로 서문을 포함한 석축성의 개축연대를 알 수 있다. 혹 광종은 충주 숭선사를 창건하면서 이곳에서 멀지 않은 망이산성을 보축한 것은 아니었을까.

망이산성
망이산성

에필로그

망이산성은 백제에서 처음 판축성으로 구축했으나 5세기 말 고구려에 지배되어 석축성으로 보축되었다. 포곡식성으로 치성이 5개나 되는 고구려 성을 대표할 수 있는 유적이다. 이번 글마루 취재반과 한국역사문화연구회 답사에서도 중국 요령성 일대와 지안일대의 여러 산성에서 출토되었던 적색의 와편들과 똑같은 다양한 와편도 확인했다.

그런데도 아직 사적으로 지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성에 대한 전문가들의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 필자는 43년 전 이 성을 처음 답사하며 고구려성으로 확인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전 단국대 교수 정영호 박사님의 혜안을 지지한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 민족 제일의 강력한 통일 국가였다. 고구려 문화회복의 의지도 컸다. 재미있게도 고려시대 초기 절터를 답사하다보면 고구려 문양을 닮은 연화문 와당들을 발견할 수 있다. 연화문의 판단(瓣端, 끝)이 뾰족하거나 고사리 문양을 한 것도 있다.

중국 일부 사학자들은 동북공정을 하면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가 아니라고 부정한다. 이는 억지 주장으로 문헌이나 유물 유적을 도외시한 자의적 주장일 뿐이다. 왕건태조를 도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운 충주 일대의 호족들은 망이성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고구려성을 대대적으로 수축, 관리를 두고 중요시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글마루 취재반과 한국역사문화연구회 답사반은 망이성의 웅장함에 감동하면서도 사적 지정 열망을 안고 아쉬운 마음으로 성을 내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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