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산성 팔각제단
설봉산성 팔각제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팔각제단 고구려 신전 아닌가

이 성에서 평양 청암리 사지(金剛寺), 경주 나정(박혁거세), 하남시 이성산성, 공산성 등지에서 발굴된 팔각제단지(八角祭壇址)가 조사되었다. 제단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것은 이 성의 중요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제단은 설봉산성 칼바위의 서쪽 20m 지점에 복원되어 있다. 경기도 하남시 이성산성의 구조보다는 작지만 고대의 정연한 팔각전지다. 이 유적은 어느 시대의 것일까.

고구려 시기 팔각전지가 발굴된 청암리 사지는 평양 시가지에서 약 3㎞ 떨어진 대동강 북안, 청암동(平壤市 大城區域 淸岩洞) 토성 안에 있다. 인근에는 대성산성, 안학궁터를 비롯 다수의 고구려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발굴 조사단은 설봉산성 유적 건물지를 제단으로 추정했다. 또한 팔각 유구 주변에서도 하남산성 답사 때와 마찬가지로 고구려계 적색와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와 가운데는 격자문 등 포천, 남양주 고구려 성지에서 수습되는 형태의 문양도 보였다.

설봉산성에서 찾아진 와편들
설봉산성에서 찾아진 와편들

고구려 후손임을 자처한 서희의 고향

이천은 고려 초기 문신으로 거란 장수 소손녕을 퇴각시킨 외교가 서희(徐熙, 942~998)의 고향이다. 서희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을 연 서신일의 후손으로 이천 서씨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난 인물이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서희의 빛나는 사연이 기술되어 있다.

서희는 993(성종 12)년 거란(契丹)이 80만 대군으로 침공할 때 중군사(中軍使)로 북계(北界)에 출전했다. 이때 거란 장수 소손녕과의 담판한다.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를 계승했다.’고 주장하자 서희는 다음과 같이 대응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후예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부르고, 평양을 국도로 정한 것 아닌가. 오히려 귀국의 동경이 우리 영토 안에 들어와야 하는데 어찌 거꾸로 침범했다고 하는가?”

서희는 또 거란과 국교를 맺기 위해서는 만주 지역의 여진을 내쫓고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해야 가능하다며 조건을 내걸었다.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중간을 점거하고 있어 육로로 가는 것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왕래하기가 더 곤란하다. 그러니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탓이다.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하여 거기에 성과 보를 쌓고 길을 통하게 한다면 어찌 국교가 통하지 않겠는가.”

결국 서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거란군 대군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담판 이후 고려는 또 강동 6주를 회복하는 외교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오늘날 왜 이런 멋진 외교, 정치가는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소손녕처럼 한국이 고구려가 아닌 신라를 계승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중국 저명한 학자들도 앵무새처럼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이 아니라고 우긴다. 1000년 전 고려 중군사 서희와 거란 장수 소손녕과의 외교적 합의 역사를 들추어 상기했으면 한다.

고려는 고구려(본래 국호는 高麗)의 후손임을 지처하며 ‘구토 회복’이란 기치를 내걸고 개국했다. 그래서 국호도 ‘高麗’라고 한 것이다. 한국민이라면 이천 출신 명신 서희의 멋들어진 주장을 가슴에 새길 필요가 있다.

남한 지역에서 글마루 취재반에 의해 계속 확인되는 많은 고구려 유적에 대한 애정과 관심도 가져야만 한다. 대 고구려가 구축한 많은 성지는 1500년이 지난 지금도 장엄하게 우뚝 서 있어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 유산임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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