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이산성에서 내려다 본 전경
망이산성에서 내려다 본 전경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음성 ‘망이산성’ 중부지역의 거대 고구려 요새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망이산의 비밀은

‘망이산(望夷山)’이라고 했다. 왜 충북 음성 삼성면 양덕리(경기도 안성군 일죽면 봉황리에도 걸쳐 있음)에 있는 이 산을 이렇게 부르는 것일까. ‘夷’의 사전적 의미는 오랑캐, 동방(東方) 혹은 종족(種族), 멸하다(滅), 평평하다(平平), 온화하다(溫和)라는 뜻이라고 한다. 망이산 정상에는 삼국시대 석성(石城)이 있다. 그래서 성의 이름도 망이산성이다.

이 성은 중부지방의 수많은 고대 성 가운데 가장 크다(전장 2.65㎞). 내·외성을 갖춘 포곡식 성으로 일부 성벽은 돌을 벽돌처럼 잘 다듬어 정연하게 구축하였다. 고준한 산 정상을 휘감아 쌓은 포곡식성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성곽 형태다. 한눈에 고구려성임을 알 수 있는데 빛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 이름의 ‘망이’는 어떤 의미이며 이 성은 어떤 역사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망이란 바로 ‘이(夷)’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고구려가 한창 한반도를 호령했을 당시 ‘夷’는 신라를 지칭한 명칭이다.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에는 신라왕을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신라를 고구려의 속국으로 여겨 낮춰 부른 때문인가.

본래 중국 고대 한인들은 동서남북에 사는 이민족들을 방위에 따라 특별한 호칭을 썼다. 즉 동쪽은 동이(東夷), 서쪽은 서융(西戎), 남쪽은 남만(南蠻), 북쪽은 북적(北狄)이라고 한 것이다. 동이족에게는 구이(九夷)가 있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보면 구이는 견이(畎夷)·우이(于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가 나온다.

<논어> 정의(正義)에는 ‘구이’의 명칭이 현토(玄菟)·낙랑(樂浪)·고려(高麗)·만식(滿飾)·부유(鳧臾)·소가(素家)·동도(東屠)·왜인(倭人)·천비(天鄙)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의 양식 있는 학자들은 다르게 해석했다. 고대 중원인(中原人)을 ‘夷’라고 했으며 동쪽에 있는 민족을 호칭했을 때 사용했다는 것이다. ‘東夷’는 가장 오래된 금석문인 <상대 갑골문(商代 甲骨文)>과 <금문(金文)>에도 나오며 ‘만이융적(蠻夷戎狄)’은 후세인들이 지어낸 것이라고 비하설을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고대 중국인들이 지칭했던 동이는 바로 산둥반도(山東半島)였다. 성인 공자도 산둥반도 곡부출신이다. 제(齊)나라를 건국한 강태공을 동이족이라고도 했는데 동이인 화화족을 최고 오래된 민족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중국 옛 사서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이족들은 신장이 크고 풍속이 순후했으며 말을 탄 채 활을 잘 쏴 전쟁을 잘했다(东夷人身材高大, 民风淳厚, 喜骑射, 善征战 云云).”

고대 중국의 치자들은 고구려, 신라를 동이족의 범주에 넣었다. 즉 고구려, 신라왕을 책봉할 때도 ‘동이’를 넣어 벼슬을 주었던 것이다. 위(魏)나라 효문제는 고구려 21대 문자왕에게는 무척 긴 직명을 주었다. ‘사지절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 동이 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 왕(使持節都督邀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 東夷 中郎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그런데 양무제나 당 황제가 백제왕을 책봉할 때는 동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다.

신라는 진흥왕 초기부터 제나라의 중심지역인 산둥반도(山東半島)로 가기 위한 해로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렸다. 한강을 통해 서해로 나가 뱃길로 산둥반도를 가려고 했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아 실패했다. 진흥왕이 제나라 개국 10년이 돼서야 사신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북제의 무성 황제는 조서를 내려 진흥왕에게 다음과 같은 직을 주었다. 고구려보다는 아주 짧은 직명이었다. ‘사지절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망이산성
망이산성

기록에 누락된 고구려 망이산성

망이산성은 <여지승람>에도 성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다만 충주목 산천조에 ‘망이산’과 봉수터만이 기록되고 있다. 큰 성이면서 고적조에서 이름이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14 충주목 봉수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망이성봉수. 동쪽으로 음성현 가섭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진천현 소을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경기 죽산현 건지산에 응한다(望夷城烽燧 東應 陰城縣 迦葉山 南應鎭川縣 所乙山 西應 京畿 竹山縣 巾之山).”

봉수대는 정상에 있다. 봉은 횃불, 수는 연기를 말하며 급보를 전하던 통신방법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빛으로 신호를 하였다고 한다. 이 봉수대는 <여지승람>의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활용된 것 같다. 이 봉수대는 장방형인데 실측치는 길이 1.2m, 폭 1.2m 이다.

필자는 1977년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단장 정영호 박사)을 따라 두 번 이 산성을 답사한 적이 있다. 지금 기억으로는 성안의 정연한 석축, 적색 와편이 다수 찾아져 흥분되었으며 특히 성안의 넓은 대지와 규모에 감탄했다.

‘망이’라는 이름을 보면 이 성의 주인공은 분명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다. 조사단장 고(故) 정영호 박사는 고구려성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망이’라는 이름이 고구려에서 신라를 호칭한 것이고, 석축의 모양과 적색 와편 등 성안 유물로 미루어 5세기 후반 장수왕의 남하시기 활용된 유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 박사가 한국교원대 교수로 자리를 옮긴 후 90년대 출간된 보고서에는 이 성을 백제~통일신라 산성이라고 했다. 1992년 단국대학교 지표조사 보고서 기록된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전략) 산성은 토축식(土築式)인 내성(內城)과 석축식(石築式)인 외성(外城)으로 나누어지는데, 봉수대가 있는 내성을 주성(主城)으로 본다. 산성 꼭대기에서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와 멀리는 진천군 일대의 평원이 내려다보이며 남쪽의 산세는 절벽으로 험준하고 북쪽은 낮은 평원이 전개되는 것을 보아, 남쪽의 적군을 대비하여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주성에는 적을 감시하고 대적하는 군사가 진을 구축하고, 뒤쪽 낮은 평원에는 주력부대가 주둔하여 많은 군사와 군마가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내성은 백제시대에 망이산 정상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성벽 길이는 약 250m가 확인되었고, 해발고도 472m 지점에는 동서 22m, 남북 12m의 봉수대 자리가 있고 그 안에 길이 1.2m, 너비 1.2m의 직사각형 모양인 봉수대가 있었다. 봉수대는 흔한 원형이 아니라는 점이 특징이다. 외성은 통일신라시대에 망이산 북쪽으로 낮은 평원을 이룬 외곽 산봉들의 능선을 따라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으며, 전체 둘레는 약 2080m이며, 남북 길이 340m, 동서 길이 500m의 직사각형을 이룬다. 성벽 안쪽에는 전 구간에 일정한 너비의 통행로가 있다. 성벽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이 많지 않으나 남문터에서 서북쪽으로 약 150m 떨어진 부분에 석축의 외벽이 보존되어 있다. (하략)”

7월 초 글마루 조사단은 한국역사문화연구회원들과 함께 이 산성을 조사했다. 삼복의 날씨, 다행히 산 정상 가까이 건립된 사찰 매산사까지 승용차가 올라갈 수 있어 석성이 구축된 곳까지는 어렵지 않게 등정할 수 있었다.

조사단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고구려식 성벽이었다. 일부 복원하여 옛 맛을 잃게 했으나 축성당시의 면모가 나타난다. 중국 지안에 있는 고구려 국내성, 환도산성, 오녀산성의 정연한 석축 상태를 방불케 한다. 어디서 이 많은 돌을 옮겨와 벽돌처럼 이렇게 쌓은 것일까. 당시 동원된 인력은 고구려 군사들이었을까. 아니면 본래 이 땅에 살았던 백제인들이었을까.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