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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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4월 19일에 영국 지리학자 비숍 여사는 경기도 여주에 도착했다. 이곳은 민왕후(1851∽1895, 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가 태어난 고을이다. 그런데 비숍은 여주를 떠들썩하고 불쾌한 최초의 고을로 기억했다. 비숍 자신이 구경거리가 된 것이다. 이는 굴욕적인 일이었다.

“거리는 지저분하고 쇠락해 있었다. 주민들 얼굴에는 가난과 나태 그리고 우울함이 널려 있었다. 관아는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관아 안에는 조선의 활력을 빨아먹는 기생충들이 우글거렸다. 나는 절을 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들은 정말 무례했다.

여주에는 ‘지체 높은 양반들이 많다’고 들었다. 단 700가구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의 현감이 높은 지위는 아닌 것 같다. 양반들은 그에게 반말을 했고, 자신의 부하처럼 명령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당시는 민왕후를 위시한 민씨 척족들이 조선을 휘둘렀으니 ‘여흥민씨’ 고을은 위세가 대단했으리라.

“그래서 지방관은 주로 서울에 살며 간혹 내려와 이권을 챙겼다. 이런 일은 여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한강 주변의 관리들은 부재중이고 주로 서울에 살았다. 나는 3명의 다른 지방 관리들과 비슷한 면담을 했다. 나는 3엔을 현금으로 바꿔 달라는 말밖에 안 했으나 그때마다 금고가 비었다는 말만 들었다. 내 단자는 외부에서 발급받은 자랑할 만한 서류였지만, 사람들이 잘 팔려고 하지도 않는 시장에서 비싸게 닭 한 마리를 산 것 말고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이윽고 비숍은 여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천양 마을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비숍은 여자들에게 붙잡혀서 서커스가 열린다는 커다란 기와집에 들어갔다.

“40여명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아주 어려 보이는 주인마님은 인디안 보석을 걸치고 있었는데 예쁘고 피부가 고왔다. 나머지 여자들은 예의가 너무 없었다. 나의 모자를 벗겨 써보기도 하고 장갑을 끼어보며 깔깔댔다. 그들은 14개나 이어지는 방을 보여주었는데 마루는 야한 브뤼셀 제 카펫으로 덮여있었고, 벽에는 프랑스제 시계와 독일제 거울들이 천박하게 돈티를 내며 모든 방에 걸려있었다.

바깥 정원에는 줄 타는 사람을 위해 밧줄이 걸려있었고, 팀파니와 갈대피리는 조선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다른 두 정원으로 안내받았는데 그곳은 돌로 된 베란다와 쇠로 된 난간이 있었다.

주인은 18세의 청년으로 조선의 가장 중요한 통치자의 장남으로 민왕후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는 우리를 환영하면서 예의 바르게 대접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외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는 내 카메라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사진을 찍으려고 점점 무례하고 무질서해지는 사람들을 피해 우리는 집 뒤로 갔다. 이때 친구 몇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최근 과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주인을 축하하고자 찾아왔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즉각 떠날 것을 요구했고, 우리는 무안하게 퇴장당했다.

프랑스제 시계, 독일제 거울, 미국산 담배, 벨벳 의자 이런 것들이 젊은 멋쟁이들에게 급속히 번져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것은 조선인의 소박함을 타락시키고, 하층민들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소비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비숍 지음·이인화 옮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살림출판사, 1994, p 109~113)

비숍은 민왕후 생가인 여주에서 크게 실망했다. 젊은 권력층들의 사치에 조선의 앞날을 절망적으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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