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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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월에 비숍 여사는 두 번째로 조선에 왔다. 이때 비숍은 고종 부부를 네 번이나 만났다.

“왕비로부터 사사로운 초대를 받았던 일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왕비의 주치의인 언더우드 여사와 동행한 자리였다.… 왕비 마마는 40세가 넘었으며 멋있어 보이는 마른 체형이었다. 눈은 냉철하고 예리했으며 반짝이는 지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왕은 키가 작고 누르스름한 얼굴을 지녔으며 약간의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른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세자는 비만하고 의지가 박약해 보였다. 세자는 병약한 환자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비숍 지음·신복룡 역주,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2015, p 257~260)

두 번째 알현에도 비숍은 언더우드 부인과 함께 갔다. 비숍은 왕비의 우아하고 매력적인 예의범절과 사려 깊은 호의, 그리고 통역자를 통해 전달되기는 했지만 놀랄만한 화술에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고종에 대한 평가는 냉정했다.

“조선왕조는 쇠퇴해갔다. 왕은 온화하고 친절한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서 성격적으로는 나약한 존재였으며 야심만만한 사람들의 손에 좌우되었다.… 불행하게도 왕은 목적에 대한 철저함과 집요함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훌륭한 개혁의 계획들이 그의 박약한 의지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위 책, p 263~265)

비숍이 세 번째로 알현했을 때 고종은 영국의 왕과 내각에 대해 물었다. 재무부 장관이 여왕의 개인적 지출을 어떻게 조정했는지를 알고 싶어 했으며, 왕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장관들을 왕이 임의로 사임시킬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이 질문들을 통역관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영국은 입헌군주제로서 전제군주제 조선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한편 비숍이 네 번째로 알현했을 때 왕비는 빅토리아 여왕에 대해 이야기 했다.

“여왕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위대함과 재산과 권력을 모두 갖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분의 건강과 행복 번영을 기원합니다.”

민왕후는 정말 박학다식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상징적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9개월 뒤에 비숍이 다시 조선에 왔을 때 왕비는 무참하게 살해당한 뒤였다.

1896년 10월에 비숍은 네 번째로 조선에 왔다. 이 시기에 그녀는 고종을 두 번이나 만났다.

“나는 2년 동안 왕을 뵙지 못했다. 그동안 왕에게 조심과 격동의 세월이었지만 왕은 지치거나 더 늙어 보이지는 않았다.… 왕은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서 내가 그의 사진을 찍는 것을 허락했다.”

그런데 비숍은 아관파천 이후의 고종을 비판했다.

“왕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자유를 즐기는 동안 조선에는 이익되는 일이 없었다.… 구시대의 악습이 매일 벌어지고 대신과 총신들은 뻔뻔스럽게 관직을 팔았다.… 1895년 8월의 불법적인 내각(김홍집 내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때때로 비양심적인 왕비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일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자신의 신변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왕은 조선왕조의 가장 최악의 전통으로 되돌아갔다. 신하들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그의 칙령은 곧 법이 되었으며 그의 의지는 절대적이었다.… 항상 비척거리는 군주는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지를 모르고 있다. 왕의 호의를 믿고 우호적인 활동을 한다는 것은 늘 무의미한 것이 되어 탐욕스러운 기생충들의 먹이가 되었다. (위 책, p 438~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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