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한 청년이 마트에 들어가 흉기로 판매원을 협박하고 경찰을 불러 달라고 했다. 경찰이 잡고 보니 직장이 없어 생계마저 어려워 교도소에 가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청년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이런 방식으로 어려움을 해결해야 하는 시대가 됐는가.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생각을 하는 젊은이들이 주변에는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마트에서 젖먹이에게 줄 우유를 훔치다 체포된 30대 가장, TV에서 아침부터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인력시장에 나갔다가 허탈하게 발걸음을 돌리는 40대 가장의 축 처진 어깨를 잊을 수가 없다. 왜 세계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교만(傲慢)’은 성공학에서도 달갑지 않은 단어다. 성공의 적이며, 교만한 자에게는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정의한다. 19세기 영국의 여류 소설가 제인 오스틴도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교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고 했다.공자가 제자 자장(子張)에게 당부한 군자의 다섯 가지 미덕 가운데도 ‘교만하지 말라’는 대목이 있다.‘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되 낭비함이 없어야 한다. 일을 시키면서 원망을 사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마땅히 목표 실현을 추구하되 개인적인 탐욕을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이순신 장군은 군법을 엄격하게 지켰다. 전라좌수사로 있을 때 왜군 침략소식을 접한다. 장군은 즉시 병력을 소집하고 700여명으로 해전을 준비했다. 그런데 군졸 황옥현이 도주했다. 장군은 군사를 시켜 체포해 참수한다.배설(裵楔)은 원균 휘하에서 경상우수사까지 지낸 인물이다. 부산포 앞에서 원균이 대패하자 배 12척을 빼돌려 전라좌수영에 전달했다. 부산 패전에 대한 트라우마로 일본군과의 싸움을 반대했다.배설은 마침 병을 얻어 치료한다고 군막을 떠났다. 그러나 약속한 날이 돼서도 돌아오지 않자 이 장군은 탈영을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편작(扁鵲)은 2500년 전 중국 진나라 명의(名醫)였다. 전설에 죽은 사람도 살려내고 환자 얼굴만 봐도 병명을 알았다고 한다. 사기열전에 보면 그는 ‘세상에 육불치(六不治)가 있다’는 주장을 폈는데 아무리 명의(名醫)라고 해도 고치지 못하는 병자가 있다는 것이다.‘첫째 불치는 교만해 의사의 이론을 무시하는 자들을 가리킨다(驕恣不論於理, 一不治也)’고 했다. 즉 고집이 세고 오만하거나 지식이 많은 사람은 의사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치료시기를 놓친다는 것이다.제나라 환후(桓侯)는 편작의 진단을 무시하고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조선 헌종 때 평양기생 초월(楚月)이 임금에게 보낸 상소문은 백성들의 고초를 고발한 것이었다. 그녀는 20세 미만의 어린 나이였는데 당대 권세가인 정승 심모의 애첩이었다. 부군의 탐관부터 고발하는 것으로 시무(時務) 상소문은 시작되고 있다.지난 70년대 초 필자가 찾아 햇빛을 본 사료인데 당시 이 글을 보고 충남대 국문과 고(故) 지헌영 교수는 평양기생을 빙자해 반골 선비가 지어낸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당시는 군사 정부시절이어서 전문을 게재한 중앙의 모 신문사는 반체제 인사들이 지어낸 것이 아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조선 왕조사회에서 ‘비답(批答)’이란 것이 있었다. 언관이나 사대부 혹은 유생들이 임금에게 상소를 하게 되면 즉시 답을 하는 제도를 말한다. 임금은 상소 내용이 비위에 거슬리고 마음에 안 들어도 반드시 답을 해야 했다.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에서도 찾을 수 없는 책임 있는 소통이었던 것이다.만약 임금이 답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됐을까. 언관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재차 부당하다고 아뢴다. 성균 유생들이 관을 비우고 대궐 앞에 나가 부복해 연좌 항의 농성을 할 때 비답이 없으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성균관 고위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지난 봄 국립청주박물관이 매우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운영한바 있는데 바로 문제가 된 영화에 대한 토론이었다. 병자호란 중 이념 대립을 그린 ‘남한산성’,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폐주 광해군을 재조명하는 ‘광해, 왕이 된 남자’ 등 여러 편의 영화가 대상이었다.이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이 광해를 소재로 한 영화였다. 줄거리는 광대가 광해가 됐다는 것을 가정으로 얘기를 만든 것이다. 사실 역사기록과는 거리가 먼 영화였지만 천만관객을 동원했다. 왜 관객들은 이 영화에 이토록 열광한 것일까.왕의 옷을 입은 광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난계 박연(蘭溪 朴堧)은 세종 당시 아악(雅樂)을 정리한 분이다. 76세 되는 해 계유정난으로 아들이 사형 될 때 죽을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세조는 나이가 많고 3조에 걸친 공신이라고 감옥에 가두지 않았다.난계의 고향은 충북영동 심천이었다. 그가 낙향하면서 청주목에서 하루 묵게 된다. 해가 기울자 난계는 피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처연하게 곡조를 탔다. 아들의 죽음과 어린 단종에 대한 아픔 때문이었을까. 구슬픈 피리소리에 몰려든 관아의 관리나 기생들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조선 유교사회에서는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조선사회에서 사대부라면 관기와 잠자리를 같이하거나 축첩(畜妾)도 가능했다. 그러나 유망한 신진사류들은 이를 꺼렸다. 사회 규범상 문제가 안 됐으나 ‘호색한 인물’이란 부정적 평가 때문이었다.선조 때 괴산현감을 지낸 조원(趙瑗)도 첩을 들이는 것을 두려워했다. 양반의 서녀로 시를 잘 지었던 옥봉이 첩이 되고자 적극적으로 나왔을 때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출세가 막힐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부(祖父)가 나서 ‘괜찮다’고 권유하자 할 수 없이 승낙한다. 조원은 첩으로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옥봉에게 일체의 시를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정치권 주요 인사들 가운데 갑자기 얼굴이 두꺼워진 이들이 늘었다. 좌충우돌 사려 없는 행동으로 국민 밉상이 되는가 하면, 나서지 않을 때 나서 말을 잘못해 성토 대상이 되고 있는 이들도 있다. 왜 여당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고 있는지 알고 있기는 한가.집을 두 채 갖지 못한다고 데드라인을 설정했으면서 눈감고 야옹하는 식의 임기응변으로 얼굴 두꺼운 행보를 하고 있다. 하기야 현 정부의 임기가 2년밖에 남지 않은 시기에서 하루가 다르게 뛰는 서울 강남 아파트를 팔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단칸방 하나 없이 월세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19년 전 일본 도쿄 신 오쿠보역에서 대한민국 청년 이수현이 선로에 치어 목숨을 잃었다. 이 청년의 죽음을 보고 일본 열도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꽃을 들고 찾아와 조화를 바치며 눈물을 흘렸다.왜 일본인들은 한국 청년의 죽음 앞에 이토록 슬퍼했을까. 그가 철로에 떨어진 한 일본인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인간을 감동시키는 데는 고귀한 희생처럼 와 닿는 것은 없다. 50년 전 아프리카 지역에서 발생한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했을 때 한 어머니의 품속에서 어린아이가 살아있었다. 극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조선 시대 대쪽 같은 사류(士流) 가운데는 성균관 생원(生員) 출신이 많았다. 원리 원칙주의자들로 머리를 굽히지 않은 탓에 고집스런 면도 있었다. 속이 좁은 사람을 가리켜 ‘꽁생원’이란 말이 생긴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충신열사 가운데는 생원출신이 많았다.기묘사화 때 정치개혁을 하려다 비명에 간 정암(靜庵) 조광조도 생원출신이었다. 정암은 젊은 시절에도 성품이 얼음장 같았다. 후학 선비들이 정암과 율곡(이이), 백사(이항복) 세 분의 호색(好色)을 비교 한 일화가 있는데 정암이 제일 좋은 점수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송나라 명판관 포청천(包靑天)을 소재로 한 중국 드라마가 한동안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가장 멋진 대사는 바로 ‘개작두’를 대령하라는 호령이었다. 최고 지존인 황실 측근마저도 포청천의 냉엄한 심판을 피하지 못했다. 포청천은 바로 백성들의 편에 서서 부패한 조직이나 권력을 응징하는 ‘정의의 사또’였다.우리의 고전 속에도 정의의 사또들이 많았다. 조선 천재문학가 허균이 소설 속에서 만든 ‘홍길동’은 권력과 부패로 찌든 양반사회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한 민심의 영웅이었다. 국문학계 일각에서는 홍길동이 실제 실존인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대한민국은 지금 어느 곳에 와 있는가. 늘어만 가는 빚더미로 나라살림은 경고등이 켜진 지 오래다. 경제 관료들은 이 엄중한 상황에서 냉철한 의지를 가지고 대처하고 있는가. 자리에 연연해 포퓰리즘으로 길들여진 무기력한 사회풍조를 눈감고 있는 것은 아닌가.여야 잠룡이나 대표격인 인사들이 2년 후 있을 대권을 겨냥해 사탕발림 정책을 구상하고 있다. 이들이 진정으로 나라의 장래를 위하는 정치인들인지 의심스럽다.국회는 진정 양심적으로 나라를 위해 일할 준비가 돼 있는가. 여야의 상임위원장 배분을 둘러싼 팽팽한 감투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유전무죄 무전유죄’. 한동안 많이 유행되던 말이다. 지금 세태에는 어떤 말이 유행할 수 있을까. 권력에 줄을 잘 서거나 당을 잘 택하면 죄를 지어도 살아남을 수 있어 ‘유권무죄 무권유죄(有權無罪 無權有罪)’라는 유행어가 생길만 한 세상이다.이미 공정의 가치가 무너져 내린 한국사회, 마지막 양심의 보루인 사법부마저 권력의 눈치를 보는 결정이 속출하고 있다. 현 집권세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여러 범죄혐의자들의 구속영장이 기각되거나 재판을 받고 있는 이들이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있다.유재수 전 부산시 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6세기 중반 백제 왕도를 공주에서 부여로 옮긴 성왕. 일본 긴메이(欽明) 천왕에게 불교를 전래하면서 특별히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관음에 대해 당부한 말이 일본서기에 나온다. 조서를 보내 보주관음에 대해 잊지 말라고 당부했으니 이것이 일본에 전래된 첫 불교 유물이 아니었을까. 성왕은 왜 ‘보주관음’을 강조했던 것일까.-(전략)…이 법은 무상의 보리(菩提)에 도달 할 수 있다. 비유하여 말하면 사람들이 여의주를 품고 필요에 따라 모두 먹은 마음대로 되는 것과 같이 이 묘법의 보물도 그렇다. 또 멀리 천축에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한국의 주요 언론들이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4.15 부정선거의혹에 대한 보도를 안 하고 있다. 검찰이 통합당 민경욱 의원의 고발사건을 수사 부서에 처음으로 배당했다는데도 침묵으로 일관한다.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는 일부 단체나 국민들의 주장이 일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권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인지. 검찰이 수사착수 했다는 평면 보도도 일부 언론만 다뤘다.요즈음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유튜버들은 연일 새로운 증거라며 많은 화면 자료를 쏟아낸다.미국의 저명한 통계학자도 한국의 4.15총선거의 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대통령을 역사적 인물에 비유해 칭찬하는 것은 지나친 아첨이다. 그런데 요즈음 집권당 일각에선 종종 이런 도가 넘는 촌평이 잦다. 이번에는 강원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 된 모씨가 문 대통령을 조선 태종에 비유했다. 그리고 차기에는 현군 세종 같은 인물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역사적 인물은 현대에 와서는 항상 포폄(褒貶)의 대상이 된다.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다르게 나오는 경우도 있다. 조선시대 난을 주도한 인물이 오늘날에는 영웅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조선 제3대 왕 태종(太宗)은 어떤 인물인가. 부정과 긍정이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요즈음 지인들과 주고받는 인사는 모바일 상에서 그림이나 동영상이다. 매일 아침 인사를 받지 않으면 궁금해지고 카톡을 보냈어도 답장이 없으면 서운한 마음이 든다. 좋은 글이나 감동을 받는 사연들은 지인들과 공유하며 뜻을 같이 하는 시대가 됐다.얼마 전 한 편의 동영상을 지인으로부터 받았다. 시골 시내버스 안에서 생긴 일로 글을 쓴 이는 30대 중반의 회사원이다.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다.경기도 외곽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한 정류장에서 노인이 한 분이 탔다. 그런데 노인은 카드나 지갑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한국은 과거 60년대까지만 해도 쌀밥 먹기가 어려웠다. 어머니는 자녀의 도시락에만 넣어줄 쌀을 조금 얹혀 놓고 밥을 지었다. 도시락을 싸고 남은 쌀밥은 아버지 몫이 된다. 겨울철 하얀 눈이 내리는 날이면 어머니는 ‘이게 다 쌀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되뇄던 모습이 기억난다.옛 기록을 보면 쌀밥을 ‘옥반(玉飯)’이라고 했다. 옥처럼 희고 빛나는 밥이란 뜻이다. 우리 풍속에는 귀한 손님이 오면 아끼고 아꼈던 쌀을 내어 밥을 지었다. ‘옥반진대(玉飯進待)’란 말은 쌀밥으로 귀한 손님을 맞이한다는 뜻이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