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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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계 박연(蘭溪 朴堧)은 세종 당시 아악(雅樂)을 정리한 분이다. 76세 되는 해 계유정난으로 아들이 사형 될 때 죽을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세조는 나이가 많고 3조에 걸친 공신이라고 감옥에 가두지 않았다.

난계의 고향은 충북영동 심천이었다. 그가 낙향하면서 청주목에서 하루 묵게 된다. 해가 기울자 난계는 피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처연하게 곡조를 탔다. 아들의 죽음과 어린 단종에 대한 아픔 때문이었을까. 구슬픈 피리소리에 몰려든 관아의 관리나 기생들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조선 유교사회에서는 중죄를 지어도 70세 이상 노인에게는 특례가 적용됐다. 역모나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아니고서는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 형옥(刑獄)이 노인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므로 배려한 것이다.

숙종 때 남인의 거두였던 허목(許穆)은 글씨로도 유명했다. 그가 80세를 넘어 큰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남인 세력들이 모두 사사되는 사건이 있었어도 사약을 받지 않았다. 고향인 연천으로 낙향, 은가당(隱居堂)을 짓고 살다 88세로 임종했다.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는 송강 정철과 쌍벽을 이루었던 가인(歌人)이다. 허목과 더불어 남인의 원로였으나 옥사에 연루돼 죽을 운명에서 나이가 많아 화를 면했다. 해남으로 귀양을 간 윤선도는 84세까지 살았으며 이곳에서 많은 시조를 남겼다.

일제 치하 감옥은 건강한 장년들도 견디기 어려웠다. 일제 강점기 1919년 조선 마지막 도화서 화원이었던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은 만세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다. 매우 건강하고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해 왔던 50대 후반 심전은 출옥 후 건강이 악화돼 몇 개월 뒤에 타계했다. 심전의 작품이 삼일운동 시기에 단절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도 48세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됐다. 단재는 8년간을 여순 감옥에서 형을 살다가 56세 되는 해 옥중에서 별세했다.

조선시대 현행법으로 적용된 대명률(大明律)을 보면 80세 죄인에게는 곤장도 때리지 못하게 했으며 고문도 허용하지 않았다. 70세 이상이거나 15세 이하인 자와 폐질에 걸린 자는 태형을 집행하지 않고 대신 속전을 받았다. 여자의 경우도 이에 준해 처리했다.

노인에 대한 배려는 임금은 물론 지방 수령들에게 최우선의 일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북송 대 명 관리였던 장횡거(張橫渠)의 미담을 예로 들면서 노인들을 살피는 것이 덕정의 요체임을 들었다. 어진 수령들은 장횡거의 미담을 복습했다. 지역에 사는 원로나 노인들을 자주 초청해 잔치를 베풀고 어려운 점을 살폈다고 한다.

조선 성종 때 조선에 왔던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은 조선부(朝鮮賦)를 지었는데 왕으로부터 지방 현령에 이르기까지 제일 우선하였던 노인예우를 가장 부럽게 바라봤다. ‘조선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치하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은 지금 어떤 지경인가. 현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사람이 먼저’라고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에게는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사법부마저 천 수백년 지켜온 인륜 중시의 법 전통마저 허물고 있다. 전임 대통령을 비롯 과거 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이들이 6~70의 나이에도 불구 현재 2~3년 가까이 수형생활을 하고 있다.

비리혐의에 대해 다툼의 여지가 있는데도 혐의를 씌워 인신구속을 밥 먹듯 허용하는 사례도 있다. 가혹할 만큼 형벌 우선주의를 채택한다면 대한민국은 인권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인내천(人乃天)이란 사람이 곧 하늘이란 뜻이며 ‘역천자망(逆天者亡)’은 맹자의 가르침이다. 하늘의 뜻을 어기고 ‘인도(人道)’를 짓밟으면 망한다는 섭리를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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