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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779(정조 3)년 규장각 외각(奎章閣外閣)에 검서관(檢書官)을 두고 그곳에 박제가(朴齊家)를 비롯하여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서이수(徐理修) 등 서얼 출신 학자들을 임명해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는데, 이는 조선(朝鮮)이 건국된 이후 능력과 학식에 상관없이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던 서얼들에게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고자 한 정조(正祖)의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정조는 규장각을 운영하면서 당하관(堂下官)의 소장 관원 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초계문신(抄啓文臣)이라 호칭하고 매달 두 차례 시험을 실시해 상벌(賞罰)을 내리는 제도를 시행했다.

1780(정조 4)년 정조를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던 홍국영(洪國榮)이 퇴진한 이후 정조는 본격적으로 규장각을 확대하는 작업에 돌입해 규장각 청사(奎章閣廳舍)를 도총부 청사(都摠府廳舍)로 이전(移轉)하고 강화사고(江華史庫) 별고(別庫)를 신축해 외규장각(外奎章閣)으로 삼았다.

아울러 내규장각(內奎章閣)의 부설기관(附設機關)으로 장서각(藏書閣)을 설립했는데, 중국 책은 열고관(閱古館)에, 우리나라 책은 서고(書庫)에 각각 비치했으며, 이에 그 소장(所藏)은 총 3만여 권에 이르렀다.

한편 정조가 각신등용(閣臣登用)에서 활용한 탕평론(蕩平論)의 주안점(主眼點)은 숙종(肅宗) 이래 실각(失脚)한 남인의 등용에 있었다. 이와 관련해 탕평론을 숙종에게 최초로 건의한 인물은 박세채(朴世采)라 할 수 있는데,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 살펴본다.

박세채의 본관(本貫)은 반남(潘南)으로서 호는 남계(南溪), 현석(玄石)이며, 1631(인조 9)년 한성 서부 양생방 창동에서 교리(校理)를 역임한 박의(朴漪)와 평산신씨(平山申氏) 사이에서 탄생했는데, 어머니는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했으며 조선(朝鮮) 4대 문장가(文章家)의 일원(一員)으로서 명성을 떨쳤던 신흠(申欽)의 딸이었다.

이와 관련해 박세채의 가계(家系)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조부(高祖父) 박소(朴紹)는 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으로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려고 했으며 증조부(曾祖父) 박응복(朴應福)은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다.

특히 조부(祖父) 박동량(朴東亮)은 ‘기재잡기(寄齋雜記)’의 저자(著者)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했으며, 선조가 승하(昇遐)하기 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켜 달라고 부탁한 유교칠신(遺敎七臣) 중의 일원(一員)이었다.

덧붙이면 박세채의 백부(伯父) 박미(朴瀰)는 선조(宣祖)의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해 금양위(錦陽尉)에 봉(封)해졌으니 박세채는 이러한 명문가(名文家)의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1648(인조 26)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지만 1650(효종 1)년 이이(李耳),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 문제가 제기되자 영남 유생(嶺南儒生) 유직(柳稷)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박세채는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로써 학문을 출발했고 이이를 존경했기에 그 상소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이에 대한 효종(孝宗)의 비답(批答) 속에 선비를 박대(薄待)하는 글이 있자 이에 분개하고 과거시험(科擧試驗)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게 됐다.

그 이후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 문하(門下)에서 수학했으며, 1659(효종 10)년 천거(薦擧)에 의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됐는데, 그해 효종이 승하(昇遐)하면서 자혜대비(慈惠大妃) 복상 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났을 때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했다.

1674(현종 15)년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 문제(墓碣名問題)로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이 대립했을 때 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현종(顯宗)이 그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서인 정권에서 남인 정권이 집권하게 됐는데, 특히 그해 겨울에 일어난 갑인 예송(甲寅禮訟)으로 관직(官職)을 삭탈(削奪)당하고 양근, 지평, 원주, 금곡,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 생활(流配生活)을 했다.

그러나 1680(숙종 6)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다시 정권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바뀌면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시작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 공조참판(工曹參判),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서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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