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caption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박세채(朴世采)는 1684(숙종 10)년 윤선거(尹宣擧) 묘갈명(墓碣名)과 관련해 일어난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의 갈등이 노론과 소론의 대립으로 확대됐을 때,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주장해 양측의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했으나 결국 소론의 편에 서게 됐다.

숙종(肅宗) 초기 유배(流配)된 이후 돌아와서는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했으나, 노·소 분열 이후에는 윤증을 옹호했다.

1689(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에 이르러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 생활(野人生活)을 했으니 이 무렵이 학자로서 큰 업적을 남긴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윤증, 정제두(鄭齊斗)를 비롯해 소론계 학자들과 서신 왕래가 많았으며, 양명학(陽明學)을 비판하고 유학(儒學)의 도통(道統) 연원(淵源)을 밝히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와 관련해 양명학변(陽明學辯)을 비롯하여 천리양지설(天理良知說), 이학통록보집(理學通錄補集), 이락연원속록(伊洛淵源續錄),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삼선생유서(三先生遺書), 신수자경편(新修自慶編) 등은 이 시기에 저술한 중요한 저서(著書)들이었다.

한편 1694(숙종 20)년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에는 송시열(宋時烈)이 세상을 떠나고 서인 내부가 노론과 소론으로 양분된 상태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박세채(朴世采)는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을 거쳐서 결국 소론의 영수(領袖)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비록 소론의 영수가 되기는 했지만, 탕평책(蕩平策)을 주장하여 당쟁을 타파하는데 기여했으며 이러한 시책은 영조(英祖), 정조(正祖)가 탕평책을 추진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思想的基盤)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박세채는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강력히 주장했으며, 남구만(南九萬), 윤지완(尹趾完)과 함께 성혼(成渾)과 이이(李耳)의 문묘배향(文廟配享) 문제를 확정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흔히 예학(禮學)의 대가(大家)라 하면 김장생(金長生)을 떠올릴 수 있는데, 박세채 또한 예학에 깊은 조예(造詣)가 있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남계선생예설(南溪先生禮設), 육례의집(六禮疑輯) 등은 예(禮)의 구체적 실천 문제를 다룬 저술로서 과거에는 없었던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의식 절차까지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학은 17세기 성리학(性理學)의 예학적 전개(禮學的展開)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며, 오륜(五倫)의 근거(根據)를 밝히는 예학의 구현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탁월한 정치가(政治家)이면서 수백 권의 저술을 남겼던 박세채는 1695(숙종 21)년 2월 5일 향년(享年) 65세를 일기(一期)로 생애를 마쳤으며, 사후(死後) 69년이 되는 1764(영조 40)년 생전(生前)에 탕평론 주장에 대한 공로가 높이 평가돼 영조(英祖)의 명(命)에 의해 문묘에 배향되는 영예(榮譽)를 누렸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