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전 앞 공사 중인 모습. 석조전 앞 계단 공사 등이 진행 중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연못이 조성될 곳에 잠시 독수리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2.25
석조전 앞 공사 중인 모습. 석조전 앞 계단 공사 등이 진행 중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연못이 조성될 곳에 잠시 독수리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2.25

 

분수대 설치… 물의 역류는 불길함 상징

거북이 조각상 ‘5톤’ 무게, 황제국 의미

물개 조각상 바꿔치기로 민족문화 비하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아관파천 이후 정국을 수습한 고종은 1897년 거처를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 또한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을 만들어 그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는 조선은 자주국임과 동시에 황제국임을 대내외에 알린 것이었으며, 석조전은 바로 이 대한제국의 상징적 건물이었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대한제국의 화려한 출발과 함께 구상된 석조전은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1910년 완공되고, 석조전에 마련된 황제침실은 고종이 아닌 영친왕이 일본에서 귀국할 때마다 숙소로 사용됐다.

 

석조전 전경과 돈덕전의 모습으로 돈덕전 옆으로 미대사관에 걸린 것 국기가 보인다. 아직 연못을 만들기 전으로 석조전 가운데로 길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2.25
석조전 전경과 돈덕전의 모습으로 돈덕전 옆으로 미대사관에 걸린 것 국기가 보인다. 아직 연못을 만들기 전으로 석조전 가운데로 길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2.25

구경거리가 된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꿈꾸며 세워진 덕수궁 석조전은 결론적으로 고종이 아닌 황태자를 위한 공간으로 마련됐다고 할 수 있다. 간혹 외국 귀빈을 위한 숙소나 왕실의 연회와 접견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석조전은 대부분의 기간이 비어있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대한제국의 위상은 계속 쇠락했고, 석조전의 위상과 용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이후 1933년 10월 1일에는 이왕직(李王職, 일제강점기 이왕가와 관련한 사무 일체를 담당하던 기구)에 의해 덕수궁의 일반개방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석조전도 미술관으로 전환되면서 덕수궁 일대는 봄이면 꽃을 구경하는 곳으로, 가을이 되면 국화전시회장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소동물원까지 개설되면서 덕수궁 일대는 위락공간으로 전락하게 된다. 1936년에 석조전 서편 공터에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의 신축이 결정되면서 1938년에는 이왕가미술관의 정식개관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원래의 석조전은 근대일본미술진열관(미술관 구관), 새로 지은 이왕가미술관은 조선고대미술진열관(미술관 신관)으로 불렸으며, 일제강점기 말에는 일본 화가들의 그림을 진열하는 공간으로 전락해버렸다.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와 함께 갖은 풍파를 겪으며 지금은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석조전 2층 중앙화랑에 걸려 있는 사진으로 석조전 앞 연못에 거북이 조각상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천지일보 2021.2.25
석조전 2층 중앙화랑에 걸려 있는 사진으로 석조전 앞 연못에 거북이 조각상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천지일보 2021.2.25

연못에서 분수로, 거북이에서 물개로

지금은 석조전 앞에 네 마리의 물개 조각상이 있는 분수가 설치돼 있지만, 원래는 중앙에 거북이 조각상이 세워진 사각형의 연못이 있던 곳이다.

연못 중앙에 자리한 거북이는 당시 5톤의 무게를 자랑할 정도의 크기였으며, 머리는 석조전을 향해 있었다. 연못은 또한 석조전이 물에 비치도록 조성돼 조형미와 아름다움을 더했다. 거북이 조각상의 무게가 5톤인 데는 그 이면에 숨겨진 뜻을 찾을 수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흔히 군주를 상징하는 동물로 용을 들 수 있는데, 이때 황제를 상징하는 용의 발톱은 5개(오조룡)이며 왕이나 황태자는 발톱이 4개이다. 우리나라는 왕의 상징이 봉황인 경우가 많지만 용 또한 왕을 상징하는 동물로 사용되기도 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지만 ‘5톤’이라는 무게 속에 대한제국은 여전히 황제국이며 자주국임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1920년대 사각형의 연못을 조성하면서 거북이 조각상이 세워졌지만 1938년 서관을 증축할 때에 연못 자리에 물개 조각상이 설치된 분수대를 만들게 된다. 왜 하필이면 물개이고, 분수대인가.

물은 위에서 아래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이치다. 옛 선조들은 물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궁궐 안에 하필이면 물이 아래에서 위로 솟는 분수대를 설치한다니, 그 배경을 살펴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게다가 물개가 동서남북을 바라보게 설치돼 있어 사방으로 물을 뿜어댄다. 장수와 부귀를 상징하는 거북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의미도 없는 물개가 궁궐 안에 들어앉게 된 것이다. 현재 석조전 앞 분수대를 장식하고 있는 물개 조각상은 일본 도쿄미술대학 교수 쓰다 시노부(津田信夫)가 1936년 제작한 ‘북해도약’이라는 청동 물개상을 1938년 재주조해 설치한 것이다.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현재 덕수궁 석조전 앞에는 연못과 거북이 조각상 대신 네 마리의 물개 조각상이 세워진 분수가 자리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1.2.25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현재 덕수궁 석조전 앞에는 연못과 거북이 조각상 대신 네 마리의 물개 조각상이 세워진 분수가 자리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1.2.25

대한제국이 영원하길 바라며 거북이 조각상을 설치한 것을 일제가 아무 상관도, 의미도 없는 물개로 대체해 그 위상을 격하시킨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비약이라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거북이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하며 부귀와 장수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풍수적으로 불길하게 생각했던 물의 역류를 연상시키는 분수대 설치는 또한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굳이 연못을 메우면서까지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관심은 덕수궁의 완벽한 복원뿐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석조전 앞 연못에 있던 그 거북이는 과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역사의 답을 찾는 것은 이제 남겨진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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