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백은영 기자] 현재 석조전과 분수대 모습. 연못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분수대와 거북이 조각상 대신 놓인 물개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천지일보 2021.2.8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현재 석조전과 분수대 모습. 연못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분수대와 거북이 조각상 대신 놓인 물개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천지일보 2021.2.8

 

덕수궁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 ‘석조전’

고종, 석조전 대신 함녕전 거주… 영친왕 숙소로

사각형 연못에서 분수로, 거북이에서 물개로 바뀌어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대한제국의 황궁 덕수궁(德壽宮). 어쩌면 유행가 가사로 더 익숙할 수 있는 ‘덕수궁’은 1897(광무 1)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나라를 빼앗긴 1910년까지 13년간 대한제국의 궁궐로 사용된 곳이다.

올해 복원 완료를 앞두고 있는 덕수궁 돈덕전(惇德殿)은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칭경(稱慶, 축하의 의미)예식을 하기 위해 서양식 연회장으로 지어진 곳이다. 이후 고종을 만나기 위한 대기 장소나 외국사신 접견 장소, 국빈급 외국인 방문 시 숙소 등으로 활용됐다. 중명전(重眀殿)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아픔이 서린 곳이다.

처음에는 서양식 1층 건물로 만들어졌으나 1901년과 1925년에 발생한 화재로 건물의 형태를 변형해 재건했다가 2009년 건물의 형태를 되찾는 공사를 실시해 대한제국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지금은 전시관을 마련해 대한제국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한문을 통해 대한제국의 화려한 부활을 꿈꿨던 덕수궁 안으로 들어가 거닐다 보면 서양식 석조 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을 만나게 된다. 석조전 앞에는 서양식 분수대와 함께 그 안에서 물을 뿜어내는 네 마리의 물개 조각상을 만날 수 있는데,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있어 2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공사 중인 석조전. 석조전 좌측에 보이는 작은 건물(빨간 원)은 일본인들이 보초를 서며 관리하던 곳이다. 고종은 석조전 옆 함녕전에서 지냈으며, 석조전에 거처하지 않았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2.8
공사 중인 석조전. 석조전 좌측에 보이는 작은 건물(빨간 원)은 일본인들이 보초를 서며 관리하던 곳이다. 고종은 석조전 옆 함녕전에서 지냈으며, 석조전에 거처하지 않았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2.8

석조전, 최초의 서양식 석조 건물

석조전(石造殿)은 덕수궁 안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석조 건물로 당시 국내에 세워진 서양식 석조 건축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1900(광무 4)년에 착공해 10년 만인 1910(융희 4)년에 완공한 열주식(列柱式) 르네상스식 건물로 동관의 기본 설계는 영국인 존 레지날드 하딩(John Reginald Harding·1858~1921)이 내부 설계는 영국인 건축기사 로벨(Mr. Lovell)이 맡았다.

지층을 포함한 3층 석조 건물로 정면 54.2m, 측면 31m이며, 지층은 거실, 1층은 접견실 및 홀,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서재 등으로 사용됐다. 앞면과 옆면에 현관을 만들었다.

석조전은 1911~1922년 사이에는 영친왕 귀국 시 임시 숙소로, 1933~1938년에는 덕수궁미술관으로 사용됐으며, 1948~1950년에는 UN한국임시위원단 회의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46년에는 이곳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며,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됐다.

이후 1992~2004년에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다가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건립되면서 이전․복원됐으며, 2014년 10월 13일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서관은 1937년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으로 지은 건물로 8.15광복 후 동관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다가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이 1998년 12월에 개관돼 덕수궁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1층 접견실은 황제를 폐현하는 방으로 서양식으로 꾸며졌으며, 석조전의 다른 방들과는 달리 황실의 문장인 이화문(李花文, 오얏꽃 무늬)을 가구와 인테리어에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2층 중앙화랑은 복도를 따라 과거의 사진들을 걸어두었다. 작은 액자틀 속에 갇힌 한 세기 전 사진들이 마치 말을 걸어올 것만 같은 곳이다.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달라고, 진정한 광복을 위해 싸워달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찬란했던 과거와 암울했던 역사가 공존하는 공간. 바로 석조전이다.

 

석조전 앞 연못과 거북이 조각상. 사각형의 연못 안에는 5톤 무게의 거북이가 석조전을 향해 머리를 들고 있다. 연못은 석조전 건물이 다 비치도록 설계됐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2.8
석조전 앞 연못과 거북이 조각상. 사각형의 연못 안에는 5톤 무게의 거북이가 석조전을 향해 머리를 들고 있다. 연못은 석조전 건물이 다 비치도록 설계됐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2.8


석조전은 황궁으로 지어졌다

석조전 완공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4월 7일자에 “덕수궁 안에 양제로 짓는 돌집이 근일에 필역(畢役)됐는데 그 역비는 구십 삼만 이천 이백 구십 원이라”며 덕수궁 석조전 완공 소식을 전했다. 1900년 공사를 시작한 지 10년 만에 완공한 것이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정국을 수습한 고종은 1897년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겨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된다. 경운궁은 이후 1902년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뀐다. 고종은 이곳 경운궁에 수많은 전각을 짓고 서양식 석조 궁전을 건립함으로써 제국의 위용을 다시 세우고자 했다.

석조전은 바로 대한제국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꿈꾸었던 고종의 의지가 반영된 건물인 것이다. 대한제국의 화려한 비상을 꿈꾸었지만 사실 덕수궁은 역사의 아픔을 더 많이 간직한 곳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장소이자, 일본 통감부의 압력에 굴복해 순종에게 양위한 곳도 바로 이곳 덕수궁이다.

대한제국의 석조전은 공사를 시작하기 전인 1900년에 미국 건축 잡지 ‘The American Architect and Builiding news’에 목재로 제작된 십분의 일 크기의 모형이 소개되기도 했다. 1911년 3월 이후에는 석조전 앞 정원공사가 이루어졌다. 인접한 중화전(中和殿)의 회랑이 철거된 것도 이때의 일로 알려져 있다.

석조전 정원공사와 관련해서는 ‘매일신보’ 1911년 2월 28일자에 수록되기도 했다. “전이사실(前理事室), 평성문(平成門), 전위병소(前衛兵所)를 훼철(毁撤)하기로 작일(昨日) 정오(正午)에 입찰(入札)을 종(終)하였다”는 기사 내용으로 보아 정원을 만들기 위해 다른 건물을 철거한 것을 알 수 있다.

근대식 정원을 위해 외국에서 들여온 나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말라 죽었다고 한다. 또한 지금 분수가 있던 자리에 사각형 연못을 조성하고 그 중앙에 거북이 조각상을 배치했으나, 1938년 덕수궁 서관(현 덕수궁미술관)을 건립하면서 현재의 물개 조각상이 있는 분수대로 바뀌게 된다.

석조전에 마련된 황제침실은 당초 고종의 침실로 계획됐으나, 고종이 석조전 옆 함녕전에서 생활함에 따라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영친왕이 일본에서 귀국할 때마다 숙소로 사용됐으며, 침실 가구에 ‘EMPEROR'S BEDROOM(엠퍼러스 베드룸)’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것이 특이할 만하다. 현대화된 화장실과 세면대, 욕실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다. 황후침실도 1911년에 순헌황귀비의 죽음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1922년 영친왕비가 영친왕과 입국 시 잠시 사용됐다. 황제침실과 대칭적으로 재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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