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온통 이순신으로 들끓었던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특히 2014년 영화 대종상에서 국내 관객 1760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돌풍을 일으켰던 ‘명량’은 무려 4개 부문의 작품상을 석권하고, 나아가 배우 최민식은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는 영예까지 얻었다. 하지만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처럼 정작 이순신 본인은 쓸쓸해 보일 듯싶다는 생각은 왜일까.

‘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풍전등화가 된 조국의 위기 앞에 가슴 조이며 고뇌하던 인간 이순신, 숱한 모함과 핍박과 고난 속에 몰래 눈물 흘려야 했던 인간 이순신은 어디로 가고, 뛰어난 지략으로 용감하게 왜군을 무찌르는 장수 이순신에 초점이 맞춰지며 하나의 관광자원으로 몰아가려는 듯한 풍조와 지방행정, 나아가 지방행정에 따른 지나친 홍보문구들은 왠지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해남에 위치한 전라도 우수영 앞바다엔 아주 소박하고 작은 동상 하나가 서 있다. 또 건너편 녹진 앞바다에는 투구와 갑옷을 입고 위엄한 자세로 진군을 호령하는 동상이 힘 있게 서 있다. 필자는 지금 아무도 관심 가져 주지 않는 이 작고 초라한 동상에 한참 동안 시선을 고정시키고 서 있다. 그리고 짧은 순간 417년 전 장군의 그 애타는 심정과 고뇌가 오버랩 되기 시작했다.

세계4대해전에 오를 만큼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한산대첩을 준비할 때도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라며 고뇌했을 장군, 그래도 그 때는 아주 조금의 여유는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한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칼 대신 지도를 들고 갑옷 대신 초라한 복장으로 울돌목을 바라보는 이순신 장군의 축 처진 뒷모습은 나도 모르게 눈가를 적시게 했다.

왜 하필 이 때 “生卽死 死卽生, 생즉사 사즉생”이라는 말로 부하들을 독려하지 않으면 안됐을까. 또 훗날 충무공 전집에 실린 글로 사헌부의 지평인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호남 방어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若蕪瑚南 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라는 표현이 나왔을까. 그 유명한 한산대첩 아니 23전 23승의 기염을 토한 승리사는 바로 호남이 뚫려서는 안 된다는 장군의 깨달음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즉, 그 유명한 한산대첩 역시 호남을 빼앗기 위해 서쪽으로 진격하려던 일본 수군의 공격루트를 막기 위한 처절한 싸움이었고, 세계해전사에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명량대첩 역시 호남이 뚫리느냐 막느냐를 놓고 치러진 대결전이었다. 나아가 명량대첩으로 대승한 장군은 왜군을 동쪽으로 밀고가 노량에서 아군 83척(청군 지원 포함)으로 왜군 200여 척을 격침시키며, 백병전과 함께 가장 치열했던 노량해전의 승리는 일본을 완전히 물러가게 했고, 7년 임진왜란은 끝을 맺는다. 물론 “戰方急 愼勿言我死(전방급 신물언아사),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며 유언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긴 채 파란만장한 사연을 뒤로하고 장군은 전사했다.

호남은 곡창지대다. 곧 생명의 땅이다. 호남을 잃는 것은 나라를 잃는 것이다. 수륙병진전략에 의해 해로와 육로로 진군하려던 왜군은 서쪽 공격루트를 통해 병력과 군량미를 지원받게 돼 있었다. 하지만 명량해전의 결과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나아가 호남의 군량미마저 지원받지 못하게 되자 자진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됐으니, 그야말로 장군의 업적은 만대에 길이 빛나고도 남을 것이며, 그야말로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이다.

장군이 고뇌했던 이유 즉, 울돌목이라는 목진지를 목숨과 바꿔서라도 지켜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울음의 바다 울돌목의 포효, 지금 이 순간 필자의 귓전에는 1597년 조선수군의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는 듯하다.

잠시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장군은 일본 수군과 스물세 번을 싸워 스물세 번을 이긴 해전사에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전쟁의 신이다. 하지만 당쟁으로 수신제가(修身齊家) 하지 못한 조정은 온갖 모함과 시기 등 장군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쳤고, 그 결과는 죄 없는 죄인이 되어 옥에 갇혀야 했고, 두 번이나 백의종군(白衣從軍)해야 하는 기막힌 길을 걸어야 했다.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칠전량전투에서 12척의 배만 간신히 건지고 일본에게 대패했으며, 일본 수군은 그 여세를 몰아 수륙병진전략과 함께 호남을 손에 넣기 위해 서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때 서애 유성룡은 임금에게 목숨을 건 간절한 간청을 하게 된다. 그 간청은 일본을 막기 위해선 이순신 장군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옥에서 풀려나와 삼도수군통제사의 무거운 짐을 다시 지고, 병든 몸을 이끌고 찾은 곳은 바로 벽파진이다. 몸을 추스릴 겨를도 없이 장흥 천관산 기슭 회령포에 숨겨둔 12척의 배를 수선하고, 전의를 상실한 채 패색이 짙어있던 진도 유민들을 설득해 전열을 가다듬어 가던 장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지금 필자의 가슴은 먹먹해지기 시작한다.

호남을 지키고 나라를 지켜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장군은 세상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래도 나라를 위한 고뇌와 집념은 하늘을 감동시켰고, 하늘은 장군에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지혜를 줬으니, 바로 울돌목 지형이요 전술이요 전략이었다. 나아가 참으로 귀한 것은 두려움 없는 용기였다.

‘내가 참으로 알 때 보인다(知則爲眞看, 지즉위진간)’는 말이 있다. 원래 이 말은 정조 때 유한준이 당대의 수장가였던 김광국의 화첩(석농화원)에 부친 발문에서 빌린 것이며,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 간즉축지이비도축야’다, 이를 다시 옮기면,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이며, 이를 한 문장으로 했을 때, “내가 참으로 알 때 보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 참으로 역사를 알 때 장군을 알게 되고, 장군을 알 때 그 심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나라와 백성을 앞세운다. 하지만 진정 충(忠)과 의(義)를 견지한 이가 있을까. 민족의 소중함을 알고 나라를 사랑한 장군, 그랬기에 장군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백성을 하나 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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