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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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되지도 않은, 그렇다고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미지의 문서들’이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다. 이른바 ‘윤석열 X파일’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큰 선거가 있을 때면 이런저런 의혹이 불거지거나 가짜와 음모의 마수들이 판을 치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국민적인 상식이나 사법적 판단으로 가짜와 음모의 ‘악성 바이러스’를 물리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히 ‘가짜뉴스’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기획과 조작 의도가 노골적인 것도 적지 않다. 특히 SNS나 유튜브 등이 활성화 된 최근에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하다. 이들을 건강한 공론장으로 가꾸어 내지 못한다면 결국 ‘민주주의의 적들’이 되고 말 것이다.

민주당 송영길 대표가 지난달 25일 한 집회에 참석해서 윤석열 전 총장과 관련된 검증 자료를 쌓고 있다고 한 발언이 관심을 촉발 시켰다. 송 대표의 설명대로라면 당 대표로서 경쟁자의 검증 자료를 쌓고 있다고 한 발언을 나무랄 수는 없다. 반대로 대선을 8개월여 앞두고도 아무런 검증 자료도 준비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다. 핵심은 그것이 검증 자료가 아니라 조작된 자료인가 하는 점이다. 아직 송 대표가 말한 그 검증 자료가 공개되지 않았으니 그걸 놓고 왈가왈부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최근 ‘윤석열 X파일’이 정치권을 강타한 직접적인 배경은 정치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장성철 ‘공감과논쟁 정책센터’ 소장의 발언이었다. 장 소장은 지난 19일 SNS를 통해 ‘윤석열 X파일’을 입수했다며 그 내용을 봤더니 윤 전 총장이 국민의 선택을 받기 힘들겠다는 다소 충격적인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윤 전 총장과 관련된 20여개의 의혹을 정리한 것이며 구체적인 자금 흐름도 나온다고 했다. 그 결과 조국 전 장관과 윤미향 의원의 의혹보다 강도가 더 심각하다고 덧붙였다. 장 소장의 논지대로라면 윤석열 전 총장은 대선이 아니라 ‘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들렸다. 그렇다보니 대선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윤 총장 주변의 온갖 소문들이 곧 수면위로 올라올 것이란 전망도 뒤따랐다.

한 번 촉발된 ‘윤석열 X파일’ 논란은 정치권 곳곳에서 불거졌다. 이쪽에서도 봤다고 하는가 하면, 또 저 쪽에서는 요약된 것을 봤다는 등 ‘믿거나 말거나 식’의 억측과 주장들이 난무했다. 심지어 ‘윤석열 X파일’이 한 두 개가 아니라 몇 개의 버전이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게다가 장 소장을 비롯해 ‘나도 봤다’는 사람들의 인터뷰 기사가 쏟아지면서 그들만의 잔치, ‘아무말 대잔치’가 돼 버렸다. ‘윤석열 X파일’의 내용을 국민은 모르니, 국민은 ‘봤다’는 사람들의 입만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구경꾼으로 전락한 국민들이 자존심, 그리고 무슨 내용인줄도 모른 채 가족들의 명예까지 상처를 입게 된 윤 전 총장의 심경이 어떨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애초 장성철 소장의 언행부터 납득하기 어렵다. 정치평론가라면 이런저런 ‘X파일’을 빙자한 괴문서들이 정치권 주변에 얼마나 많이 떠돌고 있는지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괴문서들이 정치권을 얼마나 혼탁하게 만드는지, 심지어 음모와 조작의 ‘마타도어’에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도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장 소장은 ‘윤석열 X파일’의 실체는 숨긴 채, 그걸 무기로 자신을 언론에 부각시켰으며 심지어 정치적 음모론까지 제기했다. ‘팩트’와 ‘정치적 중립성’을 핵심으로 하는 정치평론가로서의 기본적인 자세마저 놓치고 말았다. 팩트가 아니라면 허접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뭔가 기획과 조작의 냄새가 난다면 수사당국에 조사를 의뢰하는 것이 옳았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먼저 국민에게 공개했어야 했다. 그것이 ‘공인’으로서의 기본 책무다. 공론장을 통해 검증하고 논의하면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 그것이 민주정치의 최대 강점이 아니던가.

급기야 여야 정치권도 다시 소모적인 정쟁에 나섰다. 서로가 상대방 탓으로 돌린다. 송영길 대표는 야권에서 만들어 졌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근거가 없다면 무책임한 정치공세에 다름 아니다. 집권당 대표로서 적절치 않은 발언이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도 21일 최고위 회의에서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X파일’을 직접 보지도 않은 채 막연한 전망이나 억측을 내놓는 것은 제1야당 대표로서 가벼운 언행이다. 혹여 사실로 드러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당 대표로서 무책임한 발언이라는 뜻이다. 야당 대표라면 먼저 ‘진실규명’부터 하자고 했어야 했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반응도 상식 밖이다. 당초 윤 전 총장은 이른바 ‘윤석열 X파일’ 논란과 관련해 일체 대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유력 대선 주자가 자신과 관련된 온갖 의혹에 대해 대응하지 않겠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국민은 그 내용을 몰라도 된다는 뜻인가. 그래서 언론도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뜻인가. 의혹이 있다면 진실을 밝히고, 사실이 아니라면 그대로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조작과 음모가 있다면 수사 당국에 수사를 의뢰할 수도 있다. 정치인은 국민이 궁금해 하는 것을 말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정치인의 운명이다.

뒤늦게 윤석열 전 총장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윤 전 총장이 여권의 ‘불법사찰’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진실을 밝히자고 했다. 그렇다면 진실을 밝히는 효과적인 방법은 수사당국에 수사를 의뢰하는 것이다. 문건을 최초 작성한 사람, 그리고 그 문건의 내용에 대한 진위까지 모든 것을 밝혀야 한다. 물론 수사 내용이 방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명색이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라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나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다시 ‘BBK 망령’을 소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는 ‘윤석열 X파일’의 실체, 국민도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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