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어느 나라이건 기억하고 싶은 역사가 있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역사가 있다. 잊고 싶은 역사는 무엇이고 기억해야 할 역사는 어떤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하는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피로 지켜준 위대한 영웅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미국은 우리의 혈맹이다.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함께 지켜야 하는 든든한 우방이기도 하다. 6.25라는 참담한 비극을 통해 잿더미가 된 한국을 오늘날 번영을 이루게 한 힘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자유민주주의 체제였다.

한때 우리 사회에선 용미(用美), 용중(用中)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미국과 중국을 실용적 차원에서 잘 이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본에 대해서는 용일(用日)이라는 말을 안 쓰고 ‘극일(克日)’이라는 용어를 썼다. 일본에 대해선 뼈아픈 역사적 유감이 배어있는 구호였던 것이다.

우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잊지 못할 역사가 많다. 가장 가까운 역사는 동족상잔의 6.25 비극이다. 국력이 미약해 열강의 침탈 무대가 됐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역사, 더 거슬러 올라가면 병자호란, 그리고 임진전쟁의 역사다.

임진전쟁은 7년 동안 계속돼 한반도가 쑥대밭이 됐다. 수백만명의 죄 없는 민초들이 죽음을 당했고 많은 값진 문화유산을 강탈당했다.

그런데 조선을 구해준 우방은 바로 중국 명나라였다. 명나라는 천적인 일본을 견제할 의도도 있었지만 조선의 원병요청을 사대논리에서 외면할 수 없었다.

조선을 거의 점령한 일본군의 위협으로 의주로 피난한 선조는 만주로 넘어가 임시정부를 수립할 처지였다. 사직이 바람 앞의 촛불이었을 때 명나라 원군이 한반도에 들어왔다. 조명(朝明) 연합군은 일본을 밀어내고 평양성, 왕도 한성을 탈환하기에 이르렀다. 명나라 원군이 의주까지 점령했으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충북 괴산군 화양동 우암 송시열의 유명으로 세운 ‘만동묘(萬東廟)’는 명나라 원군의 도움으로 나라를 구한 보답의 징표다. 이 사당의 건립은 나라를 구해준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대명의리(對明義理)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우암의 지나친 모화사상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비판도 있으나 만주족 청(淸)을 야만으로 간주한 문화적 우월감이란 논리로 해석하는 측면도 있다. 실지로 우암은 효종과 더불어 청을 멸망시키겠다는 북벌 계획을 진행시키지 않았는가.

한반도 문화의 뿌리가 대륙 중국이라는 것을 부정할 이는 없을 게다. 고대 국가의 형성에서부터 한반도 문화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대륙이다. 대륙의 고대 문자, 전적, 문학을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의 고대 서지와 문학을 이해하기 어렵다.

중국과의 역사도 우리에겐 잊지 못할 역사다. 그래서 ‘용중(用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국과의 교역은 우리나라 수출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기업들이 중국에 들어가 실패하는 경우도 많지만 14억 인구의 대륙은 무한한 시장으로 결코 도외시할 수 없다.

대만 해협의 긴장과 미-중 간의 냉전으로 우리의 외교적 입장이 미묘해지는 현실에서 대통령은 보다 지혜로운 처신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정부의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도 바람직하다. 과거 역사에 매몰돼 새로운 역사를 열지 못하는 일이야말로 우매한 짓 아닌가. 엊그제가 임진전쟁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이었다. 12척의 배로 3백여척의 일본전함을 괴멸시킨 장군의 역사도 잊을 수 없다.

윤 대통령이 미국의회에서 멋진 영어 연설로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 시대 위정자들도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는 새로운 역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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