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고부터 뇌물이 생겼다. 부정한 관리는 뇌물을 받아야 일을 처리해주고 치부의 수단으로 삼았다. 기원전 고대 이집트 시대 때부터 이미 뇌물은 사회의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이집트 왕조는 뇌물을 ‘공정한 재판을 왜곡하는 선물’로 규정하고 행위를 단속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뇌물을 ‘동취(銅臭)’라고 했다. 이는 꽤 유명한 말로 엽전을 동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동취에 대한 고사는 후한서 ‘최열전’이다.

중국 후한 시대 말기 환관들이 권세를 잡고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국고가 바닥이 나자 왕이 관직과 직위를 팔았다. 최열이란 사람이 정승급인 사도(司徒)라는 뇌물을 주고 벼슬에 올랐는데 세상 사람들이 비아냥조로 최열의 몸에서 구리 냄새가 난다고 했다. 이후 ‘동취분분(銅臭扮扮)’이란 유행어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 삼국시대 기록에도 뇌물고사가 많다. 백제 고이왕 29년(262AD) ‘봄 정월에 영(令)을 내려 무릇 관리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한 자는 그 세 배를 배상하며, 평생토록 금고형(禁錮刑)에 처하라’는 기록이 있다.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기 전 당나라에 원병을 청하러 가다 서해에서 고구려군사들에게 사로잡혔다. 김춘추는 죽음 직전에 고구려 왕의 총신(寵臣) ‘선도해(先道解)’에게 뇌물로 청포(靑布) 300 보(步)를 주고 풀려났다.

선도해는 김춘추에게 뇌물을 받은 보답으로 그가 탈출할 계략을 알려줬다. 그것이 유명한 토끼와 거북의 설화다. 김춘추는 선도해의 말을 듣고 고구려왕에게 신라에 돌아가 ‘고구려의 한강유역 땅을 다 반환토록 하겠다’고 거짓약속하고 풀려난 것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도 각종 뇌물이 성행했다. 역대 왕들은 뇌물에 관한 사안만큼은 일벌백계로 다스렸다. 뇌물사건에 연루되면 장본인은 벼슬을 더 할 수 없었고 자식들도 관리 등용의 길이 막혔다.

세종 때의 명승 황희도 영의정일 때 뇌물사건으로 투서를 받았다. 무고였으나 황희는 임금에게 사직을 청했다. 당시 대사헌 윤형은 임금에게 ‘장오(贓汚, 뇌물을 포함해 관리가 백성들의 것을 가로채는 것)보다 더 큰 것 악행이 없다’고 간언했다.

조선조 중종 임금에겐 재미난 고사가 전한다. 궁전 안뜰에 문을 세 개 만들어 세우고, 청문(淸門), 예문(例門), 탁문(濁門)이라고 써 붙이도록 했다. 청문은 맑고 깨끗한 사람이 통과할 문, 예문은 예사사람이 통과할 문, 탁문은 깨끗지 못한 사람이 통과할 문이었다. 만조백관들에게 자기가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문을 통과하게 했다. 청문을 자신 있게 통과하는 관리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목민관들에게 청빈을 주문한 다산 정약용도 곡산부사시절 나라에 바치는 물품을 통과시킬 때 한성 성문을 지키는 무관에 잘 봐달라고 뇌물을 줬다는 고사가 전한다. 뇌물이 없으면 공연히 트집을 잡아 통과시키지 않아 곤혹스런 일을 당하기 때문이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공직자는 뇌물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국은 세계 경제 7위라고 하면서 과거 시대와 같은 뇌물공화국이란 불명예를 안고 있다. 지금 벌어지는 야당의 혼탁한 돈 봉투 사건은 이 시대 한국 정치의 위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진상을 정확히 조사하라는 국민적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지금 서민들은 50만원이 없어 대출창구에 장사진을 치고 있다. 야당은 ‘서민만을 생각한다’는 위선적인 구호가 부끄럽지 않은가. 이번 돈 봉투 사건에 연루된 야당지도층은 진실 되게 사안을 고백하고 책임을 져야만 한다. 부패한 토양에서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공정한 정치가 나올 수 없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