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충북 영동을 음악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악성 난계 박연 선생이 태어난 성지라서 이같이 부르고 있는 이유도 있지만 신라 향가 ‘양산가’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양산가는 신라 향가이며 민요 양산도는 조선 시대 노동요로 알려져 있다. 심천에서 양산까지 새 도로를 내면서 일꾼들이 흥얼거렸던 민요라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양산도에는 가사에 모란봉까지 삽입돼 지금은 경기도 민요가 됐다.

신라 향가 양산가는 어떤 노래일까. 신라 왕족이었던 김흠운이 화랑도를 이끌고 양산에서 백제의 공격을 받고 전사한 것을 서라벌 사람들이 애도한 비가였다. 지금은 본래 가사와 가락이 전해지지 않지만 역사기록을 보면 장렬하면서도 슬픈 사연을 담고 있다.

왜 화랑 김흠운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인 양산에서 전사했을까. 6세기 중반 신라와 백제는 국경을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신라는 금산 접경인 영동이 백제로 통하는 관문으로 보고 매우 중요시했다. 황간-영동을 장악한 신라는 양산 땅을 확보해야 할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대왕산성으로 불리는 양산성을 차지해야 했다. 당시 백제군은 양산성에 진주해 지키고 있었다. 무열왕은 사위인 김흠운을 낭당(郎幢)의 지휘자인 대감(大監)에 임명, 출진시켰다. 낭당이란 화랑도로 편성된 군부대 조직이었으며 보통 수백명 단위였다. 낭도가 3천명 이상 되는 대 단위 부대도 있었으며 이들은 기동력이 좋은 기병으로 이뤄졌다.

낭당 병사들은 대개 장창(長槍)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사기 기사 등을 감안하면 어떤 부대와 조우해도 패전하는 일이 없었다. 김흠운은 출전했을 때 자신만만했던 것 같다.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가야 하는 데도 낭도들과 침식을 같이 하며 출전을 준비했다.

665AD 김흠운의 낭당은 양산성 밑 성재산에 진을 쳤다. 백제가 쌓은 작은 성이지만 수백명의 군사들을 진주하기에는 좋은 방어성이었다. 그러나 양산성에서 빤히 내려다보여서 병력의 숫자와 움직임이 노출되는 약점이 있었다.

낭당 병사들이 주둔해 잠이 든 사이 양산성을 몰래 내려온 백제군사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작은 성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전쟁에 능숙하다는 낭당은 수세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부장들이 김흠운에게 탈출을 제안한다. 그러나 김흠운은 창을 잡고 ‘대장부가 나라에 몸을 바친 이상 떳떳하게 싸우겠다’고 하며 적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이를 본 낭당병사들도 모두 싸우다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서라벌 사람들은 장렬한 죽음을 애도하고 노래를 지어 부르게 됐다. 그것이 바로 향가 양산가였다.

김흠운의 부인은 바로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였으며 슬하에는 두 명의 어린 딸이 있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요석공주의 슬픔이 얼마나 컸겠는가. 혹 양산가는 요석공주가 지은 비가는 아니었는지.

양산면 원동리에 속칭 성재산은 바로 김흠운이 장렬하게 전사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역사 유적연구원과 글마루 취재반은 공동으로 성재산을 답사, 산 위에 축조한 무너진 고대 석축을 확인하고 삼국시대 토기편들도 수습했다.

신라 낭당은 ‘임전무퇴’라는 국가 수호의지를 실천한 결사부대였다. 그 힘이 바로 대한민국을 천수백년 역사 속에서 살아남게 한 강인한 민족정신이다. 양산 성재산은 수많은 화랑도의 영혼이 감도는 화랑유적이다. 정영철 영동군수가 성재산 화랑유적의 역사를 보고받고 서둘러 학적 조사를 지시했다고 하니 반가운 마음에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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