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있다. 전통 유교사회에서 스승은 임금이나 부모처럼 최고 존경의 대상으로 그림자도 함부로 밟지 못했다.

스승이 거느린 제자들을 가리켜 ‘문인(門人)’이라고 했다. 학문이 깊은 유학자들은 많은 문인을 거느렸다. 몇 안 되는 제자들을 가진 스승도 있었지만 명성을 얻으면 수백명 문인을 가진 이도 있었다.

옛날 풍속에 ‘속수례(束脩禮)’란 것이 있었다. 처음 스승을 뵈러 갈 때 존경의 뜻으로 예물을 준비해 가는 것을 지칭한 것이다.

왕세자도 사부에게 가르침을 청할 때는 속수례를 치렀다고 한다. 먼저 제자가 찾아와 ‘스승님께 배우고자 감히 뵙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면 스승은 ‘내 학식이 부족하여 도움이 적을까 두렵네’라고 대답을 한다.

제자들이 거듭 제자가 될 것을 간곡히 요청하면 ‘내 학식은 부족하지만, 예로써 올곧게 자라날 것을 약속하니 허락 하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속수례를 거치면 ‘사제의 예(禮)’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스승이 운명할 때 자식이 임종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수제자는 스승의 마지막을 지킨 경우가 많다. 우암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했을 때 지킨 이가 바로 제자 권상하였다. 우암은 제자의 손을 잡고 자신이 하지 못한 만동묘를 세울 것을 유명으로 남긴다.

권상하는 피로 물든 스승의 옷가지를 챙기고 시신을 수습해 화양동으로 옮겨 장사를 치렀다. 임진전쟁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우암의 만동묘 유명은 바로 의리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추사는 북학의를 지은 실학자 박제가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지만 스승이라고 기록된 이가 없다. 추사가 평생 스승의 예로 존경한 이는 바로 청나라 대학자 옹방강이었다. 옹방강은 추사의 학문에 큰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스승의 아호 담재(覃齋)를 본 따 ‘보담재(寶覃齋)’라고 했으며 스승이 보낸 서책을 평생 가까이 하며 공부했다.

추사의 제자 이상적은 역관이었다. 서울과 제주를 매년 오가며 청나라 학자들이 선물한 서책을 전달했다. 추사가 제주 귀양지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상적 덕분이었다. 추사는 어느 날 이상적에게 그림 한 점을 선물한다. 그것이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다.

세한도라는 제목은 논어에서 따온 것이다.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비로소 알 수 있다(歲寒然後知 松栢之後凋).’ 추사는 제자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사람은 고난을 겪을 때라야 비로소 그 지조의 일관성이나 인격의 고귀함 등이 드러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제간의 의리가 만든 이 그림은 현재 국보로 지정돼 있다.

추사에게 뼈아픈 질책과 호통을 받은 제자가 바로 매화를 잘 그렸던 조희룡이었다. 그의 작품을 보면 추사 진적과 구분이 어렵다. 추사가 귀양을 갔을 때 다른 섬에 유배되기도 했던 그는 가장 스승을 닮고 싶었던 모양이다. 추사가 운명하자 상가에 들른 조희룡은 가장 슬프게 스승을 부르며 통곡했다고 한다.

오늘날 한국을 세계 10위 안으로 이끈 것은 교육의 힘이었다. 6.25 전쟁의 상처가 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줄 알았던 한국은 많은 나라가 부러워 할 정도로 부를 구가하는 나라가 됐다. OECD에서 선진국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기도 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한국교육이 세계의 찬사를 받을 만하다고 평하기도 한다.

열악한 교육현장에서 묵묵히 사도의 길을 걷는 훌륭한 스승들이 많다. 스승의 날, 우리 사회가 진심 어린 마음으로 스승들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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