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하는 내내 국수호 춤작가의 예사롭지 않은 손놀림이 돋보였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남다른 열정으로 ‘춤음악극’ 장르 개척
자신의 몸을 예술의 도구로 승화시켜
전통춤과 현대무용 접목 위해 연구 매진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조선왕조에서 비극적인 역사로 남겨진 사도세자이야기가 춤음악극으로 부활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춤을 감상하는 독특한 장르인 ‘춤음악극’을 탄생시킨 장본인으로, 차기 공연 준비에 한창인 국수호디딤무용단장이자 춤작가인 국수호(64) 예술감독을 가까스로 연습실에서 만났다.

자신을 춤작가로 불러 달라는 국수호 감독은 10~11일 이틀간 아르코예술극장에서 펼쳐지는 춤음악극 ‘사도-사도세자 이야기’ 준비로 한창 바빠 보였다. 이런 그의 모습에서 수십 년 세월 춤과 함께 한 베테랑의 숨결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가 잠시 틀어놓았던 음악을 끄면서 입을 열었다. “다음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는 음악인데요. 칼 오르프의 ‘까르미나 부라나’라고 세계 3대 합창곡에 손꼽히는 곡입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춤음악극’이라는 장르를 개척할 만한 작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춤음악극 ‘사도-사도세자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해 달라.

이번 작품은 2007년에 공연을 했던 작품이다. 당시 내용 구성에 있어 관객의 반응이 좋았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웠다는 평을 듣기도 했는데, 음악만 들어도 되고 음악을 들으면서 춤을 감상할 수 있어서 음악회인지 무용 공연인지 착각할 정도다.

춤음악극으로서 새로운 감각을 느낄 수 있고, 고도의 집중력과 상상력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이번에는 ‘아르코 우수레퍼토리시리즈’에 선정돼 다시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단 4명의 무용수가 1시간 20분 동안 몸으로 표현하는 창작 예술을 보여준다.

사도세자 이야기는 조선왕조 최고의 비극적인 역사다. 정치 분쟁에 휩쓸려 죽어간 한 부자의 이야기를 작품화했으며, 작품 속에는 화해와 상생의 메시지가 포함돼 있다.

—업그레이드 된 작품인데 어떤 점이 힘들고 새로웠는가.

사도세자가 8일간 뒤주 속에 갇혔던 이야기를 통해 죽음을 맞이하는 사도세자를 보면서 관객들은 오히려 새로운 생명의 언어를 얻어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게 하는 형식이 어려웠다.

음악은 두 대의 피아노가 주선율이고 시간의 흐름을 바이올린이 맡는다. 인물의 성격은 피아노로 표현하고, 공연 중간에 ‘영혼의 소리’라고 해서 카운터테너가 나온다. 이렇게 4명의 배우와 4종류의 음악 포지션이 만들어져 사도세자 이야기를 완성했다.

—춤작가ㆍ안무가ㆍ무용가 국수호의 인생이 궁금하다. 처음 무용을 접하게 된 계기가 있나.

고등학교 때부터 무용을 접하게 됐다. 어려서부터 무당이 굿하는 것을 보고 자랐고, 중학교 때는 학교 내 밴드에서 큰북을 치며 서양 음악을 접했다. 또 전주농고 시절에는 농악대에서 장구를 치며 한국음악을 배우게 됐고, 서라벌예대 무용과에 들어가 본격적인 춤 인생이 시작됐다.

군대 제대 후에는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3학년에 편입해 무용극을 준비했고, 대학원 시절에는 춤의 뿌리를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민속학을 수학했다. 이러한 과정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모두 중요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춤을 출 때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임하는가. 또 춤의 매력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무용수로 출발을 했다. 춤을 잘 춰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릴 때 꿈이 70세가 되면 명무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도 ‘한국춤’의 정통성을 가지고 창작에 임한다. 개인적으로는 전통춤을 공연하는데, 누구보다도 잘 출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 지금은 창작하는 데 주력을 하고 있지만, 본연의 전통춤 연구와 공연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한다. 70세가 되면 춤을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명무로 거듭나고 싶다.

춤은 힘든 직업 중의 하나다. 몸으로 예술을 표현하는 무용가는 심신이 괴로울 때도 직업이기 때문에 해야만 한다. 반드시 자기 자신을 이겨내야 성공할 수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성공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춤을 추는 데 있어 꾸준히 갈고 닦아 공들인 몸짓을 무대 위에서 표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무용가라고 할 수 있다. 몸이 내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을 때는 고통도 그만큼 더 따른다. 하지만 그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부지런히 연마하고 공을 들인 몸짓이 생각대로 움직일 때 비로소 무대 위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영혼의 그림자로 비치는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 때 개막식 안무를 지도했다.

1988년에는 40대로, 춤 인생의 정점이었다. 안무가로, 무용가로 2600여 명을 이끌고 ‘화합’이라는 작품을 했다. 한국의 춤과 민속놀이, 무용과 공연이 조화를 이뤄 세계인에게 한국의 문화를 알렸던 기회였다.

또 2002년에는 세계인이 보는 가운데 큰 천을 흩날리며 혼자서 ‘기원무’를 췄다. 올림픽에선 한국 문화의 형식적인 부분을 보여줬다면, 월드컵에서는 한국 문화의 깊이를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대형춤극 외에도 다양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시대마다 어떠한 춤을 사람들에게 선보일 것인지 고민한다. 1998년에는 신라춤을, 이듬해인 1999년에는 백제춤을, 2006년에는 고구려춤을, 2009년에는 가야춤을 만들었다. 모두 춤극이다. 특히 고구려 춤은 20여 년간 중국을 수십 번 오가면서 자료를 수집해 완성했다.

한 나라에는 가악무(歌樂舞)가 있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노래·음악·춤은 나라를 건국하는 데 필요한 요소였다. 단군도 신단수 아래에서 제를 올리며 춤을 췄다고 전해지고, 무속에서 남자 무속을 일컫는 ‘화랭이’라는 말은 신라 ‘화랑’을 지칭하는 원어였다. 화랑들은 선무도 등을 추며 도를 닦아왔다. 이렇듯 나라를 세우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은 가악무를 할 수 있어야 했다.

—후배 무용 학도들에게 조언 한마디.

꿈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된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기 때문에 행복하다. 인생에서 왜 희로애락이 없겠는가.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만큼 멋진 삶도 없다. 단, 하고 싶은 것을 하되 연습을 충실하게 부지런히 해야 하는 것이다.

▲ 국수호 예술감독이 신무를 추고 있다. (사진제공: 디딤무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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