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김덕수

우리 불자(佛子)들이 수행(修行)을 함에 있어 그 방편이 무엇이든 ‘목표는 분명히 정하되 과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네요. 이 평범한 진리(眞理)를 한 순간이라도 망각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는 수행자는 곧 바로 병폐(病弊)가 붙습니다.

매 순간 충실하고 하루하루 충실하게 정진(精進)하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목표에 도달합니다. 갓난아기가 앉을 줄 알면 어느 날부터는 무엇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두 다리로 서 보는 연습을 합니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렇게 신중할 수가 없어요. 아직 다리에 힘이 없어 후들거리면 살짝 앉았다가 다리가 짱짱해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 결코 서두르지 않고 노력하면서 때를 기다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두 다리가 자기 몸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으면 그 때부터는 걸음마가 쉽습니다.

마른 논에 물을 대어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마냥 물을 대어도 흔적이 없어요. 메마른 땅이 물을 무한정 들이켜는 것 같아요. 그러나 바닥이 물기를 머금게 되면 금방 물이 고여 차오르게 됩니다. 모든 수행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기본 과정에 충실하고 충실하여 한결같이 밀고 나가다보면 평탄대로를 달려가는 것이죠.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조바심으로 한결같이 쌓아가는 과정은 등한시하고 목표를 이루기에만 급급하다보면 도(道)에는 멀어지게 됩니다. 수행을 해서 언제까지 도를 통하고 말겠다고 기약을 하는 것도 욕심이요, 위험한 일입니다. 기초(基礎)가 튼실하고 그 과정이 알차다면 못 가게 막고 온갖 장애가 물밀듯이 닥쳐와도 한결같이 밀어붙이는 저력(底力)이 있습니다.

중용(中庸) 제이십장에 ‘인자(仁者)는 인야(人也)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인(仁)이란 천지가 만물을 생생(生生)하는 마음이고 사람이 그 생생하는 이치를 닮아서 태어나므로 본래 사람은 인자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인자함도 이 우주의 한결같은 성실함에 기초합니다. 이 우주의 무수한 천체들이 서로 한 치의 오차(誤差)와 위착(違錯)도 없이 운행했었고, 운행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운행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 우주 대자연의 성실(誠實)함입니다.

우주의 성실함과 인자함 속에서 인간이 태어났으므로 본래 성실하고 인자스러운 것이 사람의 근본 성정(性情)입니다. 그런데 다들 줄여 먹어서 소인(小人)이지 누구나 대인(大人)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성실함은 과정에 충실한 행위지 목표에 뜻을 두지 않습니다. 하루하루를 실심(實心)으로 살아가다 보면 결과가 좋을 것은 자명합니다. 이치(理致)가 그렇습니다.

절 수행(節 修行)의 참뜻도 이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절을 제대로 하기 전까지는 108배 수행이 좋다고 봅니다. 한 배 한 배 정성스럽게 하다보면 호흡과 절이 조화롭게 되어 틀어진 몸이 반듯해지며 막혔던 기혈(氣穴)이 뚫리게 됩니다. 몸이 반듯해지고 기혈이 뚫리는 경지는 쉬운 것이 아니나 또한 그렇다고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맹자에 ‘일일폭지(一日暴之) 십일한지(十日寒之)’란 글귀가 있습니다. 하루 한 시간 수행하고 나머지 시간은 방일(放逸)되는 수행자들의 실상을 적시한 내용입니다. 이왕 수행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오롯이 행동거지 모두를 공부에 초점 맞춰야 합니다. 앉는 것도 공부요 걷는 것도 공부요, 잠자는 것도 공부며 밥 먹고 노는 것도 공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일상생활 속에서 공부가 됩니다.

요즘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佛子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는 시간이 들쑥날쑥하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 항상성이 없는 데서 몸의 조화와 균형이 깨집니다. 몸의 조화와 균형이 무너지고 여기에 물질적 스트레스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건강이 무너집니다. 근자에 국내외적으로 존경받던 스님이 폐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수행을 제대로 하면 있던 병도 낫고 불치병, 아니 난치병이라고 판정된 것들도 다스려집니다. 우리 불자들이 깊이 반성(反省)해 볼 일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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