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제 언론인

‘길’은 토종 우리말이라 어감이 좋다. 그래서 넓고 질러가는 길보다 좁고, 돌아가거나 험한 곳에 길이라는 이름이 많이 붙는다.

마을 뒤편의 ‘뒤안길’, 좁은 ‘고샅길’, 논두렁의 꼬불꼬불한 ‘논틀길’, 잡풀 무성한 ‘푸서릿길’, 호젓한 ‘오솔길’, 산비탈 기슭의 ‘자드락길’, 돌 많은 ‘돌너덜길’, 사람 자취 거의 없는 ‘자욱길’, 발자욱 없는 눈이 소복이 쌓인 ‘숫눈길’…. 요즘 도시에선 꺾이면서 사이사이로 연결된 골목길이 주목받는다.

도심 공동화로 쇠락하던 골목길의 부활이 1990년대 중반 X세대 거점 홍대를 시작으로 인사동, 대학로 삼청동, 가로수길, 이태원으로 확산됐다. 이제 ‘~단길’ 같은 골목상권이 서울에서 전국으로 번지는 로컬 전성시대다. 골목길이 지역과 로컬 브랜드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골목의 문화적 가치가 이곳저곳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노후 주택과 건물, 빈 상가, 폐창고나 공장 등의 유휴 공간을 사람과 돈이 모이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도시 기획자, 로컬 크리에이터들도 뜨고 있다. 이들이 지방을 ‘세공 안 된 보석’으로 귀히 여기며 다양한 실험을 벌이고 있다. 사람과 자본이 몰려 있는 거대도시의 병폐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인천 구도심에서 8년 넘게 ‘개항로 프로젝트’를 펼치는 도시 기획자 L 씨와 차담을 나누며 감명을 받았다. 그는 영화 간판을 만들던 연로한 동네 어른을 모델로 세운 ‘개항로’ 인천 맥주로 선풍을 일으키자 곧 증류식 인천 소주도 선보이려 한다.

조합원이나 주주와 다른 방식의 동업자 ‘크루 (crew)’ 10여 명과 로컬 비즈니스를 벌이고 있다. 2~3명씩 한 팀을 이뤄 창업 아이디어를 짜서 각기 건물을 매입해 개성 있는 콘텐츠를 입히고 있다. 이들이 운영하는 카페, 통닭집, 창업 공유공간 등 20여 곳이 개항장 내 핫 플레이스로 소개되고 있다.

필자는 사실 L씨가 개항로에 진출한 초기에 몇몇 사람으로부터 펀딩을 받으려 한다는 소리를 듣고 ‘갭 투기꾼’ 아류일 수 있다는 의심도 했지만 기우였다. 그는 아직 개항로를 뜨지 않고 열심히 젊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로컬의 신(神)’이란 책도 펴냈다. 누리꾼 사이에 사건 사고가 많은 인천을 비하하는 용어인 ‘마계魔界)’를 빗대 ‘마계대학’이란 창업학교를 지난해에 이어 올 설 연휴에 개강한다.

젊은 창업가를 대상으로 지역 고수 현장 전문가들이 실전 교육을 펼친다. 2박 3일간 밤새워 술을 마시며 토론하고, 수강생들이 직접 벤 살코기의 육질을 탐색하며 구이법을 창안해보는 등의 독특한 창업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L씨와 같은 로컬 크리에이터들의 열정으로 서울 연남동 ‘연남 방앗간’과 성수동 ‘수제화 거리’, 제주도 ‘해녀의 부엌’, 부산 보수동의 ‘헌책방거리’, 대구 방천시장 ‘김광석 거리’, 강원 양양의 ‘서피비치’, 광주 양림동 ‘펭귄마을’이 탄생했다.

지방소멸 위기에서 탈출해 젊은 사람들이 U턴해오는 일본의 히라도시는 유행처럼 번지는 골몰길 성공 모델 이상의 지역 창생 본보기다. 일본 서쪽 가장 끝자락에 있는 규슈 북부지역 히라도시는 에도막부(1603~1868) 시대에 금교령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이 탄압에 못 이겨 숨어들어와 신앙을 계승해온 잠복(潛伏) 그리스도교 성지이자 서해 고래잡이 기지로 번성했던 곳이다. 2000년대 들어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재정 악화로 위기 선언이 나올 정도의 소멸 가능지역이었다.

2014년 이후 활발한 민관협업을 통해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역사자산을 활용해 일본에서 가장 많은 고향 기부금을 거두는 실적을 올렸다. 시민들이 ‘없는 것을 졸라대기’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훌륭하게 활용하기’의 사고방식으로 똘똘 뭉쳤다. 고향 기부한 타 지역민과 기업체에 ‘소량 다품종, 계절 한정’의 차별화된 답례품을 전달하며 지역 브랜드화를 시작했다.

부채새우, 소라, 참굴, 가리비, 황금참복 등 계절 수산물과 채소 및 과일 오마카세 세트 등 ‘히라도 산’만을 취급한다는 원칙이 신뢰를 받으며 일본 최고의 신화를 남겼다. 이제 히라도는 ‘기부하고 싶다’에서 ‘가보고 싶은’ ‘살고 싶은’ 고장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서울 일극체제를 비롯한 도시 양극화, 불평등 모순을 탈피해 사회 통합적 도시화의 길을 찾아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부동산과 성장 논리만이 횡행하는 ‘승자독식 도시화’ ‘금권 도시화’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골목길 가치를 아는 젊고 유능한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지방에서 히라도 같은 모델이 자꾸 생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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