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제 언론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세계 곳곳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전쟁 현장의 고통스런 모습이 SNS와 TV 영상을 통해 실시간 중계된다.

‘날 것의 영상’들이 진실을 전달하고,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게 하면서 전쟁과 갈등이 사라지도록 하는데 얼마나 기여할까? 대중들이 비극적 영상을 보고 슬퍼하고, 아픔을 공유하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데 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 경기 가평에서 3만여 명이 모여 평화를 염원하는 종교 행사에 우연히 참석해 상념에 젖다 보니 필자 또한 그런 부류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비행태만 따져보아도 그렇다.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파괴로 인해 공룡이 사라진 것 같이 인류도 증발할 제6 대멸종의 인류세를 심히 걱정하고는 있다.

석기시대 인간이 하루 4000칼로리의 에너지를 소비했으나 미국인은 그보다 60배 많은 22만 8000칼로리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 이걸 알고 있으나 난 여전히 고기 먹기를 기피하지 않으며, 과잉소비 패턴도 바꾸지 않고 있다. 그나마 인천, 경기지역 개펄의 세계자연유산 지정 확대를 위한 생태 보존 및 관광 자원화 시민 활동에 나서고 있는 게 위안거리다.

토스토옙스키 장편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런 고백의 구절이 있다. “인류 전체를 더 많이 사랑할수록, 사람들 개개인은 점점 덜 사랑하게 됩니다.” 인류에 대해 열정적 봉사를 생각하며 십자가를 질 것처럼 다짐하지만 실상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희박하다.

이날 신천지예수교회 창립 40주년과 ㈔하늘문화세계평화광복(HWPL) ‘지구촌 전쟁 종식 평화 선언문(DPCW)’ 공표 8주년을 맞아 새벽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교인들도 평화를 간구했다. 세상의 변화나 평등 사회를 바라는 포부 대신 개개인의 실속있는 삶에 훨씬 관심이 커진 ‘가벼움의 시대’에 보기 드문 광경이다.

가평 평화연수원 실내와 작은 마당에서 ‘제도적 평화를 위한 문화 간 대화와 이해’라는 주제의 포럼, 신천지 12지파별 문화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반경 1~2㎞가량의 야외공간에서 인산인해를 이룬 참석자들이 질서정연하게 지켜보았다.

예전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서울 장충동에서 유세를 할 때 운집한 청중들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수많은 인파를 일시에 감당하기 힘든 공간에서 행사가 치러졌기에 참석자 대부분이 타고 온 버스를 멀리 주차해두고 행사장까지 1시간 넘는 거리를 걸어서 들어오고 나갔다.

전국 곳곳에서 북한강이 흐르는 경기도 가평의 외진 곳까지 찾아오는 성의와 열정이 감탄스러웠다. 전쟁을 일으키는 독이 되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세상을 치유하는 역할도 하는 종교의 힘에 새삼 놀랬다.

HWPL은 2016년 전쟁 종식과 세계 평화 내용을 명시한 평화 제도화 국제법(UN 제시)에 각국 대통령이 서명하고, 세계 시민들이 평화의 사자로 나설 것을 촉구하는 DPCW를 선언했다. 또 필리핀 남쪽 민다나오섬에서 정부군과 반군 간 수십 년에 걸친 전쟁을 중단하도록 중재했고, 이후에도 평화 정착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벌이고 있다.

2014년 3월 무기를 내려놓기로 한 방사모로 포괄협정을 체결하도록 한 이후 최근 민다나오 자치구에서 HWPL이 제작한 평화교육 교재가 각 학교의 교과서로 채택됐다고 한다. 포럼에서 방사모로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의 교육부장관이 이런 사실을 전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부족전쟁을 중지시키는 ‘하나의 에티오피아 만들기 프로젝트’를 열성적으로 펼치고 있다고 한다. 물리적 충돌이라도 우선 멈추게 하는 일조차 쉽지 않은데 종교인과 청년 평화 사도들이 신앙을 넘어서 국제기구 같은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무언가 바꾸려는 인간의 행위가 긍정적이고 옳은 방향이라면 무조건 박수치고 싶다. 필자는 팔만대장경 판각지에서 사찰 복원 불사를 하는 스님에게 농사를 배우고 있고, 몇몇 스님들과는 명상 대중화를 위한 불교시민운동을 벌이는 입장이다. 한때 홍익정신을 알리는 국학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하며 지도자 과정도 밟기도 했다. 특정 종교인이 아니기에 다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타인의 고통’을 저술한 미국의 에세이 작가 수전 손택은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 만을 베풀기를 그만두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일갈했다. 연민을 넘어서 물리적 충돌을 끝내게 하고, 폭력과 불평등 없이 지속적인 평화를 이루는데 도움되는 실천이 절실한 때다.

2000년 전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유대인이었는데, 정작 그분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도 광기에 사로잡힌 유대인 군중이었다. 이제 ‘광기의 외침’은 사라지고, 타인의 고통을 구경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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