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제 언론인

엊그제 120여 년 역사가 사라질 뻔한 초등학교에서 뜻깊은 민관협의회가 열렸다. 필자를 포함해 참석자가 20명 정도의 소규모 회의였으나 ‘교육여건 개선을 위한 소통회의’라는 다소 거창한 명칭이 붙었다. 회의 장소는 인천 최초 공립학교인 창영초교 문화재관 사랑채. 일자형 적벽돌 2층에 아치형 현관문, 격자형 창틀, 나무 복도 등 근세 풍모를 간직한 건물이다.

창영보통학교에 다니던 어린 학생들이 1919년 3월 6일 전화선을 끊고 동맹휴교를 선언한 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현재 교정 안에는 ‘3.1 독립운동 인천 발상지’라는 기념비가 건립돼 있다. 당시 학생과 시민들이 합세한 시가행진이 강화읍 장터, 계양 황어장터, 용유도 등 인천 시내 9곳으로 퍼져나갔다.

1896년 ‘인천부공립소학교’로 출발한 이 학교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 초교다. 3.1 독립운동 때 시위를 주도한 김명진, 이만용, 박철준, 손창신 등 4인방 학생을 비롯해 한국 미학의 선구자 고유섭, 해방 직후 2대 대법원장을 지낸 조진만, 추사 이후 최고 서예가로 꼽힌 유희강, 국민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 훈련병이 잘못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 부하들을 살려낸 강재구 소령이 창영초교 출신이다.

이런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임에도 원도심에 있는 터라 입학생 감소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입학생 36명이기에 간신히 2개 학급을 꾸리고 있으나 조만간 1개로 줄어들 것이다. 교사와 학부모들은 낡은 시설의 개보수부터 원하고 있으나 문화재 보호구역이라 제동이 많이 걸린다.

지난해 초 창영초를 인근 금송재개발구역으로 옮기고 해당 용지에 여자중학교를 신설하는 안이 추진된 바 있다. 공청회, 인허가 절차 등 학교 이전에 필요한 행정절차를 모두 마치고 교육부 최종 결정을 앞두고 있었다. ‘창영학교 이전 사태를 우려하는 시민모임’을 중심으로 시민사회의 거센 반발로 무산되긴 했으나 할 일이 태산 같다.

명문 전통을 잘 이어가려면 무슨 일부터 해야 할까. 교육청은 교육여건 개선을 위해 교사 2개 동의 환경개선부터 착수하기로 했다. 외벽과 화장실 개선, 창호와 복도 바닥 교체, 옥상 방수 공사에 약 40억원을 투입한다는 것이다. 특정 학교에만 일시에 많은 예산을 배정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더라도 하드웨어 중심적인 안이한 계획이라는 생각이다. 교육 내용의 획기적 개선 없이 시설만 약간 고친다고 활력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신설학교에 없는 역사와 전통을 무기로 삼아 첨단 테크놀로지와 결합한 교육 혁신을 선도하겠다는 포부가 최대 덕목이 아닐까 싶다. 학생들에게 생각하거나 질문할 기회를 거의 주지 않고 편리한 시설에서 교사들이 설명해 주는 대로 외우고, 암기하고, 시험을 치르는 교육모델은 전 근대적으로 치부된 지 오래다. 강의식 수업을 답습하지 않고 학생 스스로 깨우쳐 탐구하고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교육 방식 도입을 교사와 학부모들이 진지하게 논의해주면 좋겠다.

폐공장을 문화예술거점으로 바꾼 전북 전주의 팔복예술공장에서 진행된 교육프로그램은 참고할 만한 사례다. 폐공장 도시재생이 이뤄지는 2~3년 사이에도 예술창작공간으로 활용됐다. 예술가들이 강사로 나서 키즈카페 스튜디오에서 창작 놀이를 하게 하고, 시민 1000여명이 자유롭게 사진을 찍어 매주 전시회를 열었다.

주민 주도의 파티가 열리는가 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조합을 구성해 카페와 식당을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을 창업했다. 초중고생의 감수성과 창의력을 길러낼 수 있는 다양한 실험적 예술교육프로그램을 지역 주민, 예술가와 함께 만들었다. 시설 개보수를 하면서도 철저히 인간 중심, 소프트웨어 중심적 사고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미국이나 유럽 강의실에선 학습자 위주로 활발히 토론하고, 반론하며 서로 다른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한국 교육 풍토에서 가장 허약한 부분이 다양성이다.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에서 인문, 철학, 과학, 예술, 체육 간 장르 통합의 교육프로그램을 선보인다면 학생 감소에 따른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창의적인 교과과정이 소문나면 오히려 학생들이 찾아오는 학교가 될지 모른다. 지역소멸위기에 놓인 전국 학교들도 창영초교처럼 각자의 특색을 살려 지속가능한 돌파구를 찾아야 할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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