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과거 조선은 시인(詩人)의 나라였다. 어린이가 세 살이 되면 시를 습작하기 시작했다. 천자문을 떼면 당나라 명시를 읽게 하고 시를 쓰게 했다. 시는 일상의 전부가 되고 소년부터 치르게 되는 각종 과거에도 제일 과제가 되었다.

시를 잘 짓지 못하면 과거 급제는 기대 할 수 없었다. 장원급제를 한 응시자의 시험지는 임금에게까지 진상되어 품평을 받는다. 급제자는 임금의 총애를 받고 가장 짧은 시간에 고속 승진을 했다.

소년 시절 등과한 급제자들은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격인 승정원 관리가 되었다. 임금이 옆에 가까이 두고 충성스러운 신하로 키우기 위함이었다. 조선 오백년 동안 명인들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 관리로 출발한 이들이다.

얼마 전 어린 정조가 세존 시절 쓴 시가 문화재가 되었다는 뉴스를 보았지만 백성들의 시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소녀들도 이백이나 소동파 시집을 옆에 끼고 시를 외우며 가슴에 담고 살았다.

조선 중엽 옥천군수를 지낸 종실서녀 이옥봉은 시를 너무 좋아했다. 부친이 보던 소동파 시집이 다 헤지도록 많은 종이를 소비하면서 시작을 했다. 옥봉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양반 청년 조원을 사랑하게 된다.

비록 자신은 서녀였지만 왕손이라는 긍지로 조원에게 시집가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옥봉은 용감하게도 할아버지에게 조원을 신랑으로 삼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조선시대 이면 사회 풍속사를 보면 이처럼 용감한 규수들이 많았다.

조원은 옥봉을 첩으로 허락하면서 대신 시를 쓰지 말 것을 서약 받는다. 그런데 옥봉은 남편과의 약속을 깨며 시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남편에게 소박 맞고 길거리로 쫓겨난다.

그녀는 조원의 집 앞에 움막을 짓고 살았지만 남편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그리고 임진전쟁이 일어나자 생사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옥봉의 두루마리 시가 조선에 출병한 명나라 사신의 눈에 띄어 명나라 수도 연경에서 먼저 시집으로 출간됐다고 한다.

대전 출신 시인 고(故) 박용래 선생은 필자의 중학교 은사였다. 마음이 소녀처럼 고왔던 시인은 ‘싸락눈’이라는 시로 지금도 사랑을 받는다. 그런데 시인은 제자들에게도 항상 존댓말을 썼다. 지난 80년대 대전 선술집에서 선생을 잠깐 뵈었을 때 목에 빨간색의 털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딸이 떠 준 것이라고 자랑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시인은 40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도 착한 얼굴을 잊은 적이 없다.

102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인생의 마지막 소망은 시를 쓰고 싶다고 한 기사를 감동 있게 읽었다. 노교수는 중앙 언론에 나라 걱정이 담긴 용기 있는 글을 써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강원도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에는 김 교수가 기증한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조선백자 분원자기, 다완 등 수백점의 유물들이다. 서적이나 육필들은 양구인문학박물관에 있다. 이를 볼 때마다 욕심 없이 사신 노교수의 마음에 머리가 숙여진다.

‘시를 사랑하지 않는 민족은 멸망한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마음을 순화하고 영감을 주는 시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문학이다. 만약 시가 없다면 세상은 암흑과도 같을 게다.

지금도 전쟁의 소용돌이로 고난을 받는 곳에는 저주와 증오만 있지 시가 없다. 핵무기를 가지고 연일 대한민국을 겁박하는 북한 유일체제에 인간의 아름다움과 정서를 존중하는 시가 있을까.

우리는 원로 김 교수의 소망처럼 시인이 되고 싶은 나라 자유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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