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도니람 저드슨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던 데는 선교사들의 역할이 컸다. 그중 미얀마 땅에 복음의 씨를 처음 뿌린 이가 아도니람 저드슨이다.

미국 최초의 선교사이기도 한 그는 미얀마로 건너간 후 평생을 그곳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며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했다.

그가 미얀마 땅에서 결실을 맺기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뿌린 씨는 엄청난 결실을 가져왔다. 그가 죽은 직후의 미얀마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21만여 명이 이르는 기독교인이 보고됐다.

◆총명했던 어린 시절
아도니람 저드슨은 1788년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한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해 16살의 나이에 브라운 대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도 수석으로 졸업을 했다. 이후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1807년부터는 소수의 학생들과 모여 기도회를 열었다. 이 기도회는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나라들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기를 기도하는 모임이었다.

주로 대학 운동장에 있는 건초더미에서 모임이 가져 ‘건초더미 기도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는 이 활동을 하면서 점차 해외선교의 비전을 갖게 됐고,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목회자회의에 선교사업과 관련한 청원서를 냈다. 이에 미국에서는 해외선교회가 구성됐다.

해외선교를 하기로 결심한 그는 결혼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아내와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도로 떠났다. 아내 또한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터였기에 그를 도와 함께 떠나기로 했다.

처음에는 인도의 한 지방으로 가려 했으나, 입국을 거부당하면서 미얀마로 향했다. 미얀마는 원래 그가 원한 선교지였으나 외국인에 대한 박해 소문으로 선교지를 바꿨던 터였다.

당시 미얀마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오랜 시간 불교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은 들어본 적이 없는 생소한 존재였다. 게다가 정부가 낯선 종교에 대해서 박해를 하면서 어려움은 더욱 가중됐다.

그리고 열대성 열병이 유행하면서 아도니람 부부는 죽을 고비도 몇 차례 넘겨야 했고, 6개월 된 아들도 이 열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영국과 미얀마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아도니람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2년여 동안 옥살이까지 해야 했다. 낯선 땅에서 겪는 고난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6년여 만에 얻은 결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오랜 시간 복음을 전하고자 노력했으나, 생소한 종교에 선뜻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오랜 기간 회심자가 나타나지 않아 많은 실패와 좌절을 맛봐야 했다. 게다가 낯선 땅이었기 때문에 아내 외에는 마음을 터놓고 함께 이야기할 가족이나 친구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복음을 전했고 마침내 6년여 만에 마침내 원주민 최초의 첫 회심자가 나타나면서 첫 세례를 베풀게 됐다. 이를 시작으로점차 회심자가 늘어났다.

그는 옥에서 나온 후에는 20여 년에 걸쳐 신·구약 성경 전부를 미얀마어로 번역하는 일도 담당했으며 미얀마 영어사전을 완성했다. 그렇게 미얀마에 복음의 씨를 뿌린 그는 1850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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