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not caption

1910년 8월 4일 밤 11시에 총리대신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를 방문했다. 신소설 ‘혈의 누(血─淚』)’의 작가로 잘 알려진 이인직은 28세인 1900년 2월에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 정치학교에서 공부했는데, 고마쓰는 이 학교 국제법 교수였다.

1903년에 이인직은 한국 정부의 유학생 소환령을 거부하고 미야코 신문사의 견습 기자로 일하다가 일본 육군성 통역으로 들어가 1904년 러일전쟁 때 종군했다. 이후 그는 1906년 2월에 송병준이 창간한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 주필이 됐다가 ‘만세보(萬歲報)’ 주필을 거쳐 이완용의 추천으로 ‘대한신문’ 사장이 됐다. 이인직은 1906년 7월 22일부터 10월 11일까지 ‘만세보’에 ‘혈의 누’를 연재했다. 청일전쟁 때 평양이 첫 배경인 이 소설은 문명사회에 대한 동경과 자유결혼을 주제로 하지만 지나치게 친일적이다.

한편 이인직은 고마쓰에게 “역사적 사실에서 보면 병합이란 결국 종주국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자 고마쓰는 “병합 후 한국 황실은 일본 황족의 대우를 받으며 충분한 세비를 지급받는다. 내각 대신과 관리들도 불온하지 않다면 귀족 대우를 받고 세습재산도 받는다”고 답변했다.

이인직은 이 사실을 즉시 이완용에게 알렸고, 이완용은 한일병합 추진을 결심했다. 며칠 후 이인직은 고마쓰를 두 차례나 더 만나 이완용의 조속한 병합 제의를 알렸다. 당시에 일본은 더위나 가시면 합병을 추진할 생각이었다. 나중에 고마쓰는 1936년에 발간한 저서 ‘명치외교 비사’에서 “그물 속으로 물고기가 뛰어든 기분이었다”고 적었다.

8월 16일에 이완용은 농상공부 대신 조중웅을 통역 겸 참모로 데리고 통감 관저로 데라우치를 찾아갔다. 방문 목적은 도쿄를 휩쓴 수재 위문이었지만, 실제로는 병합 문제를 조속히 마무리 지으려는 것이었다.

이완용은 일본이 제시한 병합안에 대부분 동의하면서 국호와 황실 존칭 문제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했다. 이러자 일본은 국호(한국을 조선으로 개칭함)는 고수했고, 황실 존칭은 이완용의 의견을 받아들여 고종은 이태왕, 순종은 이왕, 영친왕은 왕세자로 양보했다.

이완용과 데라우치의 한일병합 협상은 30분 만에 끝났다. 당시 내외 신문과 통신들은 매국 협상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이덕일 지음, 근대를 말하다. p84~95)

8월 18일에 병합조약안은 별다른 수정 없이 내각회의를 통과했고, 8월 22일에는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에서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거쳐 이완용이 전권위원으로 임명됐다.

이날 순종은 조령(詔令)을 내려 병합조약을 맺도록 했다.

“짐(朕)이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한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 피차 통합해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은 상호 만세(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까닭임을 생각했다. 이에 한국 통치를 들어서 이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고 이어서 필요한 조장(條章)을 규정해 장래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보장하기 위해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하고 일본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회동해 상의해서 협정하게 하는 것이니 제신(諸臣) 또한 짐의 결단을 체득해 봉행하라.” (순종실록 1910년 8월 22일)

나라를 팔아 황실과 대신의 안녕을 꾀한 대한제국. 이런 나라에 태어난 백성들은 참으로 불쌍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을 보는 것 같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