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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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은 두 모습이다. 1945년 8.15 해방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다. 해방정국 3년을 살펴보자. 미국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8월 15일 정오에 히로히토 천황은 무조건 항복 선언했다.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였다. 미국과 소련이 남북을 분할 점령한 것이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은 일본 참전을 약속했지만 계속 미루었다. 그런데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이틀 후인 8월 8일에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북한에 진입했다.

8월 15일에 태평양 방면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는 ‘일반명령 제1호’에서 “38도선 이북의 일본군 항복은 소련이, 이남의 일본군 항복은 미군이 접수한다”고 발표했다.

남한은 9월 8일에 미군이 진주하기 전까지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가 주도했다.

1945년 8월 10일에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의 안전 귀국과 생명·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송진우에게 치안과 행정을 맡아주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대한민국임시정부만이 통치 권력 이양 권한을 갖고 있다면서 거부했다.

8월 15일 오전에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는 다시 여운형에게 요청했다. 이를 승낙한 여운형은 17일에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의 조직을 완료했고, 전국적으로 145개 지부에 이르렀다.

여운형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극우세력(한민당 계열)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극좌세력(박헌영의 조선공산당 계열)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나 균등의 원칙을 존중한 중도 우파세력(안재홍의 국민당계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지향하나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부정하는 중도 좌파세력(여운형의 인민당 계열)”을 모두 참여시켰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52 대한민국의 성립, p101)

그러나 건준은 곧 균열을 겪었다. 부위원장 안재홍 등 우파세력은 9월 4일 좌경화된 건준을 탈퇴했다.

한편 미군의 남한 진주가 임박하자, 건준은 9월 6일 경기여고에서 1천여명의 인민 대표자들이 모인 가운데 전국 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했다. 이 회의는 전국인민대표위원에 이승만·여운형·허헌·김규식·김구·김성수·김병로·신익희·조만식 등 55명과 고문 12명을 선출하고, ‘조선인민 공화국(약칭 인공)’ 수립을 선포했다.

따라서 건준은 9월 7일 해체됐고, 9월 8일에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재무부장 조만식 등을 추대했다. 하지만 사전 동의 없는 추대여서 무리를 낳았다.

이렇게 건준 해체와 동시에 조선인민공화국이 급속도로 조직되게 된 배경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여운형과 박헌영 등이 해방정국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좌파세력은 형식적이라도 국내 각계각층의 사회 세력들이 참여하는 정치 세력들을 만들어 미군정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고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

둘째,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맞설 수 있는 정치조직을 만들 필요성 때문이었다.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한 것도 그런 의도였다.

그런데 송진우·김성수 등 우파계열은 ‘임시정부 봉대론’을 주장하며 인공을 인정하지 않았고, 9월 16일에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다.

10월 10일에 아놀드 미군정 장관은 성명을 발표해 “남한에는 미군정만 있을 뿐 다른 정부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공을 부인했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산책 1940년대 편 1권,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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